【팩트TV】 세월호 참사로 304명의 고귀한 생명이 목숨을 잃은 지 2년이 지났다. 그러나 아직 세월호에 대한 진실은 아무것도 밝혀진 것이 없이 지금까지 왔다. 또 아직 세월호엔 9명의 실종자가 남아 있다.
유가족은 극한 단식까지 하며, 진상규명을 이룰 수 있는 제대로 된 특별법을 강력 요구했지만, 결국 수사권·기소권이 제외된 반쪽짜리 특별법만 만들어졌다.
반쪽짜리 특별법에 따라 세월호 특조위가 구성됐지만, 지난해 정부가 강행한 시행령에 따라 진상규명은 더욱 난항을 겪고 있다. 새누리당은 세월호 특조위를 ‘세금도둑’으로 폄하하고, 일부 의원은 세월호 특별법 제정이나 세월호 인양에도 반대해 유가족의 거센 반발을 사기도 했다.
세월호 인양은 오는 7월이 예정이지만, 6월에 세월호 특조위 활동이 종료될 예정이다. 이대로 간다면 세월호 사건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열쇠인 세월호 선체에는 제대로 손도 못 대보고 끝나는 상황마저 벌어질지 모른다는 것이다.
‘세월호 광장’으로 불리는 광화문 광장 외에도, 젊은이들이 많이 다니는 홍대에도 세월호 풍경이 있다. 매주 월~토요일 오후 2시부터 한시간 여동안 서울 홍대입구역 8번 출구 쪽에선 “아직 세월호에 사람이 있다”는 외침이 들려온다. 외치는 이들은 지나가는 시민들에 노란 리본을 나눠주고 있다. 바로 이들이 외치는 것은 세월호의 조속하고 온전한 인양이다.
<팩트TV>는 지난 2일, 홍대에서 피켓팅을 진행하는 세 분을 만나서 인터뷰하는 시간을 가졌다. 세월호 2주기를 맞아 세 편에 걸쳐서 인터뷰를 연재한다. 처음 인터뷰한 분은 홍모 씨(50대 여성)라는 분이다.
세월호 사건에 관심가지시게 된 계기는요?
세월호가 수장되는 모습을 TV로 보면서, 정말 마음 안타까웠어요. 그러면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매주 주말마다 1년반동안 서울에서 열리는 문화제나 추모제 계속 다녔습니다. 그 전까진 한 번도 행동해 본적이 없었는데 세월호 때문에 행동하게 된 겁니다. 서울에 오면 광화문을 그냥 지나가지 못하고, 한 번씩 꼭 들르곤 했어요. 수원에서 사는 저는 서울 자주 올 일이 없었는데 세월호 이후로 서울 지리도 많이 알게 되고, 교통편도 익숙해졌죠.
홍대에서 피켓팅을 하시게 된 계기는요?
아직 9명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어요. 또 진실규명을 위해선 세월호의 온전한 인양이 반드시 필요하죠. 실종자 가족인 허다윤 학생의 부모님이 청운동 동사무소에서 피케팅을 하시다가, 홍대로 자리를 옮기셔서 피켓팅 하시길래 저도 함께 피켓팅을 홍대에서 하게 됐습니다. 수원에서 홍대까지 오는데 한시간 반, 왕복으로 치면 3시간, 거의 낮시간을 홍대에 있는 거죠. 일요일만 제외하고 거의 매일같이 홍대에서 피켓팅을 하고 있습니다.
다윤이 어머니가 홍대에서 자리를 잡기 수월했던 게, 홍대입구역 주변에서 포장마차 하시는 분들이 많이 도움을 주셨더라구요. 의자도 빌려주고, 겨울에 그 추운 날씨엔 오뎅 국물이라도 드시러 오라고 하셨구요. 특히 그 포장마차는 노란리본을 컵에다 담아놓고 오는 손님들에게 나눠주시기도 하더라구요. 한번 채우면 이삼일에 한 컵이 다 비워질 정도로 많이들 나눠주신다고. 그래서 저희가 자체적으로 만든 노란리본을 보내드리기도 합니다.
어쩔 땐 저도 홍대 8번 출구 앞에서 혼자 피켓팅할 때도 있어요. 그렇지만 그 분들이 지켜보고 있는 거에요. 가끔 지나가면서 시비 거는 사람들이 있는데, 혹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니까 도움 주시려고 계속 지켜보시더라구요, 정말 좋은 분들이죠.
홍대에서 피케팅 활동을 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시다면?
토요일 홍대에선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지나가죠. 제가 피켓들고 구호를 외치니까 어떤 남성분이 한참 저를 쳐다보시더라구요. 그러다 사라졌다가 다시 와서 박카스 한 박스와 캔커피를 쥐어주면서 힘내시라고 한 다음에 가시더라구요. 피켓도 눈여겨봐주시고 지나가는 분들이 그래 주시면, 정말 뿌듯하죠.
반대로 가끔 지나가면서 태클 거는 사람들도 있다. 얼마 전에 있던 일인데 어떤 나이든 아저씨가 ‘배가 2년이나 바다 속에 있는데 거기에 사람이 있겠어요. 이런다고 그 사람이 살아돌아와요’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아저씨 가족 중에 여행을 갔다가 집에 안 왔어요. 어디에서 사고 나서 죽었대요. 그럼 그 사람 안 찾아요?’라고 물었죠. 그러자 ‘죽었는데 어떡해요. 찾으면 뭐하는데’라고 하는 거에요. 그런 사람들 보면 너무 기가 막혀요. 정말 그런 일을 자기가 당하면 함부로 말하지 못할 건데, 남의 일이라고 함부로 말할 수가 있느냐는 거죠. 자기가 꼭 당해봐야 하는 건지 너무 답답하더라구요.
세월호에서 중요하게 느끼는 부분이 있다면?
지금 2년이 되도록, 증거인 선체를 가져다놓고 조사해야 하는데, 여태껏 그러고 있지 못하잖아요. 미수습자 가족들이 그토록 바라는 세월호 인양, 저희가 미수습자를 생각하면서 피켓을 들고 있죠.
계속 우리는 온전히 인양될 때까지 외쳐야지 않을까 싶어요. 지난 2014년 4월에 우리 모두 분노하면서, 모두 눈물 흘렸잖아요. 그런데 지금 그 많던 사람들 지금 다 어디 갔어요? 시청광장이나 청계광장 다 메우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함께 했던 사람들이 반만이라도 현장에 나와 있으면 정부가 지금 저렇게까진 못하겠죠. 그래서 세월호가 정말 인양될 수 있도록 더 많은 사람들이 행동하고 나와 줬으면 좋겠습니다.
‘아직도 세월호냐’ 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세월호를 잊지 말고 기억해주시라고 외치긴 하지만, 그 당시에 울분을 토하면서 눈물지었던 사람들은 아직 기억하고 있을 거에요. 아직 세월호가 인양되지도 않았는데, 그냥 잊지만 않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봐요.
세월호 600일 될 때쯤, 모 매체 기자가 저희 피켓팅 하는 곳으로 와서 ‘세월호 600일 추모 즈음해서, 다윤이 부모님을 뵙고 싶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여기선 미수습자 수습을 위해 세월호 인양을 외친다. 다윤이 부모님은 600일 추모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라고 답했죠. 내 딸을 찾아야한다는 마음으로 여기 서 있는 것인데, 추모 즈음해서 왔다는 것은 좀 아닌 거 같았죠. 그 분들에겐 추모한다는 말이 있을 수가 없으니까요.
미수습자 가족들은 세월호가 인양되고 나면, 더욱 힘든 싸움을 해야할지도 몰라요. 우리가 옆에서 같이 응원해주고 지켜볼 수 있을지 참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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