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TV】 일본 아사히신문이 제2차 세계대전 와중에 자사가 군의 거짓 선전을 그대로 받아쓰는 등 신문의 사명을 저버렸음을 반성하는 기사를 실어 화제다.
<연합뉴스>등에 따르면, 아사히는 2일 “최근 안보법안 제·개정으로 전쟁과 평화를 되물어야 할 시점이 됐다.”며 과거 일본이 전쟁을 선택했을 때 신문이 무엇을 했는지 돌이켜보자는 취지로 자신들이 남겼던 ‘큰 오점’을 조명했다.
1942년 일본군이 미군에게 대패했던 미드웨이 해전 당시 아사히는 “(적에게) 심대한 손해를 안겨줬다.”고 정반대의 결과를 선전한 군의 발표를 그대로 전했다.
아사히는 또한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이 스스로 철도 일부를 폭파한 류탸오후 사건을 만들어 내고도 ‘중국 병사의 짓’이라고 거짓 선전한 군부 선전을 그대로 받아썼다. 또한 사설을 통해 일본군의 군사행동이 자위권을 행사한 것이 정당한 양 정당화했다.
A급 전범들이 대거 합사돼 있는 야스쿠니 신사(사진출처-JTBC 뉴스영상 캡쳐)
류타오후 사건 다음날 군이 일왕의 명령도 받지 않고 한반도에 있던 일본 육군을 만주로 파병해 일왕의 군 통수권을 침해했지만, 육군성을 담당하는 기자들은 이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는 기사를 쓰지 않았다.
일본의 중국 침략에 대해서도 이를 ‘어쩔 수 없는 임기(臨機) 처치’로 서술했다. 일본군이 괴뢰 국가인 만주국을 세웠을 때에도 “환영하게 됐다”고 전했다.
아사히는 당시 현장에서는 보도 태도의 변화에 대한 비판과 우려가 있었고 만주 사변 발생 14년 후 일본이 파멸적인 패전을 맞으면서 이런 우려가 현실로 확인됐다면서, 제대로 보도하지 못한 데는 검열 등 보도통제를 꼽았다.
또 애초에 군부에 비판적이었던 것 때문에 군이나 우익세력으로부터 '반군', '적국'이라고 매도당하고 우익단체의 폭력 행사 위협에 시달리거나 만주사변 발생 후 아사히신문 불매 운동이 각지에서 벌어지는 등 압력을 받은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아사히신문은 지난 1991년 한국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을 최초로 보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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