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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동학혁명 120년, 동학의 성지는 엉터리였다
등록날짜 [ 2014년11월07일 14시22분 ]
팩트TV 보도편집팀




【팩트TV】 집중기획-갑오동학혁명 120년, 동학의 성지는 엉터리였다
 
 
정운현
여러분, 올해가 무슨 해인지 기억하십니까? 말띠 해, 갑오년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인 1894년 갑오년에 녹두장군 전봉준이 이끈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전북 정읍에서 조선 조정의 부정부패와 탐관오리들의 학정에 맞서 농민들이 낫과 죽창을 들고 봉기했었죠. 동학농민군은 ‘폭도를 제거하고 백성을 구한다’는 뜻의 ‘제폭구민’과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케 한다’는 ‘보국안민’을 기치로 내걸었습니다. 삼남지방을 평정한 후 한양으로 진격하던 농민군은 우금치에서 관군과 일본군 연합군을 만나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패했습니다.
비록 외세의 힘에 눌려 실패했지만 동학농민혁명은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민중혁명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동학혁명의 발상지인 전북 정읍 황토현 전적지는 동학농민혁명의 성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황토현 전적지의 실상을 살펴봤더니 충격적이었습니다. 과연 어떤 상황인지 현지를 취재하고 온 정락인 부장과 함께 얘기 나눠보겠습니다. 정 부장, 어서 오세요. 황토현 전적지에 다녀오셨죠?
 
정락인  
네, 그렇습니다. 문화재 제자리 찾기 대표인 혜문스님과 정읍 황토현을 동행 취재했습니다. 먼저 화면으로 보시죠.
 
▶ 혜문스님이 황토현 전적지를 걸어 들어가는 모습과 전경
 
정운현
황토현에 어떤 일이 있는 겁니까?
 
정락인
5.16군사쿠데타 이후인 1963년 10월, 동학농민봉기의 농민군 봉기와 승전을 기념하는 최초의 동학혁명기념탑을 황토현 전적지에 세웠습니다. 전두환 정권 때인 1983년에는 4만 5000여 평의 부지를 확보하여, 그해 말 황토현 전적지 기념관도 건립했습니다. 
그러나 동학혁명 기념탑과 전적지 기념관의 시설물은 엉터리의 극치였습니다. 동학정신을 훼손하고, 엉터리 고증이 난무했으며, 심지어 친일 잔재로 넘쳐났습니다. 이 지경인데도 학계와 언론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정운현
사실이라면 충격적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1. 전봉준 장군을 ‘선생’으로 표기
 
정락인 
크게 5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동학혁명 지도자인 ‘전봉준 장군’의 호칭입니다. 아시다시피 전봉준 장군은 동학농민군을 이끈 ‘녹두장군’으로 불렸는데, 동학 유적지 곳곳에서 장군이 아닌 ‘전봉준 선생’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또한 고부에 위치한 전봉준 장군 고택에도 ‘선생’으로 표기했습니다.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입니다.
 
▶ 전봉준 장군 동상, 고택지 ‘선생’ 표기
 
정운현
아니, 농민군의 ‘장군’을 선생으로 표기하다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런 겁니까?
 
정락인
이는 전봉준 장군이 정식 장군이 아니라 ‘농민군 장군’이었기 때문에 악의적 의도로 오인하여, 사실을 왜곡한 것으로 보입니다.
 
정운현
그러니까 국가에서 정식으로 인정한 장군이 아니라서 의도적으로 폄하했다는 것이군요. 참 한심스런 일입니다.
 
정락인
이에 대해 혜문스님의 인터뷰 영상을 한번 보시죠.
▶ 혜문스님 인터뷰 - 장군 호칭에 대해
 
정운현
또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2. 농민군 장군, 양반으로 둔갑
 
▶ 황토현 전적지 전봉준 장군 영정
▶ 황토현 전적지 전봉준 장군 기록화
 
정락인
농학농민군은 ‘양반쌍놈 차별을 없애자’며 신분철폐를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전봉준 장군의 영정과 기록화를 보면 유생처럼 정자관을 쓰고, 도포를 입고 있는 전형적인 양반 복장입니다. 소위 ‘훈장 선생’을 그린 것이죠. 불합리한 신분제도를 개선하겠다고 봉기한 사람에게 양반 복장을 입혀서 사실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정운현
하~아, 정말 한심하군요. 농민군 장군을 ‘선생’으로 표기하고, 신분철폐를 주창하며 봉기한 동학군 지도자를 타도 대상인 ‘양반’으로 그려놓다니.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황토현 전적지의 문제가 이것만이 아니라고요?
 
3. 친일조각가 전봉준 장군 동상 제작/황토현 전적지 곳곳 일본산 단풍
 
▶전봉준 장군 동상
 
정락인
네, 그렇습니다. 동학 농민군은 ‘척양척왜’ 즉 ‘서양과 일본을 배척한다’며 봉기했습니다. 그런데 황토현 전적지의 전봉준 장군 동상은 친일 조각가 ‘김경승’이 제작했고, 전적지 곳곳에는 외래종인 일본산 노무라 단풍이 식재되어 있습니다.
 
정운현 
친일 조각가 ‘김경승’은 저도 익히 들어서 압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의 태평양 전쟁에 적극 협력해야 한다”는 주제로 두 차례나 조선 총독상을 수상했죠. 친일미술단체 조선미술가협회 간부로 활동했고, 전람회의 수익금을 국방헌금으로 바쳤던 자입니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정부와 유착하여 수유리의 사월학생 혁명 기념탑을 건설하여 3.1문화상을 수상했습니다. 5공화국 때는 평화통일 정책자문위원을 지냈고, 은관 문화훈장까지 받았죠. 독립운동가와 민족의 영웅을 친일 조각가가 제작하는 웃지 못할 행보입니다. 여기다 동학군 지도자인 ‘전봉준 장군’의 동상을 만들었다니, 지하의 전봉준 장군과 동학농민군들이 통탄할 일이군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정락인
이와 관련해서 황토현 전적지 관리소장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이영주 소장과의 대화
 
정운현 
황토현 전적지에 일본산 노무라 단풍이 얼마나 심어져있습니까?
 
정락인
일일이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그 숫자가 적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혜문스님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 혜문스님 인터뷰: 일본산 노무라 단풍에 대해 
 
4. 동학혁명기념탑에 새긴 한자(輔→保) 틀렸다
 
정락인 
충격적인 일은 또 있습니다. 당시 언론보도를 보면, 5.16군사쿠데타가 있은 후인 1963년 10월 3일, 황토현에 5m높이의 갑오동학 혁명기념탑이 건립됐습니다. 제막식에는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과 정부 요인 그리고 지역주민까지 3만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박정희 의장은 치사를 통해 "5.16혁명과 동학혁명은 이념면으로 일맥상통하다"며, “어떠한 정부도 백성을 잘 살리는데 근본목표를 삼아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백성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정운현
5.16군사쿠데타를 ‘동학혁명’을 통해 합리화 시키는 거군요. “어떠한 정부도 백성을 잘 살리는데 근본목표를 삼아야 하며, 그렇지 못하면 백성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참 좋군요.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 재임 18년 동안 ‘백성을 살리는 통치’였나요? 그런데, 동학혁명기념탑의 문제는 무엇인가요?
 
정락인
동학혁명기념탑에는 동학 농민군의 기치인 ‘폭도를 제거하고 백성을 구한다’는 뜻의 ‘제폭구민(除暴救民)’과 ‘나라 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보국안민(輔國安民)’을 한자 전서체로 새겼습니다. 
그런데 제가 현장에 가보니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는데요. ‘보국안민’의 ‘보’자는 원래 ‘도울 보(輔)자’를 써야 하는데, 기념탑에는 ‘보호할 보(保)’자를 써넣은 것입니다. 화면을 통해 전봉준 장군 영정 옆에 쓰인 것과 탑에 쓴 것을 비교해 보시죠.
 
▶ 전봉준 장군 영정 사진 글자+혁명기념탑 글자 비교
 
정락인
왼쪽에 있는 것이 전봉준 장군 영정 사진 오른쪽에 써 있는 ‘보국안민의 ’보‘자는 ’도울 보‘입니다. 그런데 오른쪽 동학기념탑의 ’보국안민‘의 ’보‘자는 ’보호할 보‘입니다.
 
정운현
아니, 동학농민군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동학의 기치를 새기면서 글자를 틀리게 썼다니, 이해하기 힘듭니다. 어쩌다 이런 일이 발생한 겁니까?
 
정락인
네, 저도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관련 자료를 샅샅이 찾아봤는데요. 동학혁명기념탑 건립 당시, 국고 300만원을 투입하여 ‘건립위원회’까지 꾸렸습니다. 1960년대에 50평 기준 주택 한 채 값이 45만 원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300만원이면 일곱 채를 살 수 있는 큰돈입니다.
 
정운현
아니, 그런 큰 돈을 들이고, 동학혁명의 기치를 훼손하는 엉터리 한자를 썼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동학혁명 단체나 학계와 문화재청은 뭐하고 있었습니까?
 
정락인
이것에 관해 한 곳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문화재청 담당자도 정확하게 알지 못했고, 정읍시청 관계자도 최근에 알았다고 합니다. 정읍시청관계자와의 전화 인터뷰를 들어보시죠.
 
▶ 정읍시청 관계자 전화인터뷰
 
정운현
이런 사실을 언론이 몰랐을 리가 없는데요. 왜 침묵하고 있던 겁니까?
 
정락인 
동학혁명기념탑을 세울 당시의 언론보도를 보면 가관이 아닙니다. 1963년 10월 4일자 <경향신문>과 10월5일자 <동아일보>를 보겠습니다.
 
정락인
둘 다 동학혁명기념탑을 세웠다는 내용이고, 동학혁명기념탑에 새긴 ‘제폭구민 보국안민’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은 ‘제폭구민과 보국안민’을 제목으로 뽑았는데 정작 틀리게 새긴 도울 ‘보’자는 그대로입니다. 5일자 동아일보도 마찬가지입니다. ‘동학혁명 정신인 ’제폭구민 보국안민‘이라고 하면서 
역시 틀린 도울 보 ‘자’가 있죠? 이것을 보면 기사를 쓴 기자나 데스크도 틀린 ‘한자’를 전혀 몰랐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정운현 
동학관련 기사를 쓰면서, 동학군이 주창했던 기치의 한자도 몰랐다는 것인가요? 건립추진위원회를 꾸리고, 당시 집 일곱 채 값인 세금을 부어서 만든 것입니다. 동학의 기치인 한자를 틀리게 적었다니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드네요.
 
정락인
문화재청과 동학단체들도 나중에서야 이 문제가 걸렸던 모양입니다. 혁명 기념탑 옆에 탑을 설명한 부분을 보면, 틀린 한자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한 부분만 읽어보면 “전서체로 새겨진 보국안민의 ‘보’는 ‘輔(도울 보)’가 맞으나 안보(安保)를 강조하던 시대 상황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保(보호할 보)’로 새겨졌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안내판은, 탑을 세울 당시가 아닌 2011년 이후에 교체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래 사진은 2012년 12월19일 한 블로거가 올린 것인데, 안내판의 내용이 지금과 전혀 다릅니다.
 
정운현
동학농민군의 기치인 한자가 틀렸다는 건, 단순 실수로 보기에 석연치 않습니다. 
동학혁명의 뜻을 폄훼하려는 친일잔재 세력의 의도가 의심되는 대목입니다.
 
정락인
전봉준 장군과 동학군들이 분노해서였을까요. 
1970년 8월, 이 탑은 벼락을 맞고 두 조각이 됐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5. 영정, 기록화 훼손, 집강소 관리 부실
 
▶ 흰색 줄이 드리워진 전봉준 장군 영정
 
정락인 
보시면, 전봉준 장군의 영정과 기록화에 얼룩이 있습니다. 동학농민운동 때 농민군이 설치한 자치기구 김제 ‘원평 집강소’는 관리조차 되지 않아서 없어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건물주는 대문을 잠그고, 집강소 건물을 팔겠다는 안내문까지 붙였습니다. 취재진이 갔을 당시만 해도 개인소유로 사용하다가 방치했는데요. 뒤늦게 문화재청이 집강소 건물과 부지를 사들여 복원한 후, 김제시에 관리를 맡기기로 했습니다.
 
정운현
문화재청에서 원평 집강소를 사서, 복원하겠다니... 늦었지만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군요. 동학혁명은 한동안 ‘동학난’으로 불리며 폄훼돼 왔으며, 독재자들은 정권 합리화 목적으로 동학이념을 이용하곤 했습니다. 참여정부 시절인 2004년 ‘동학농민혁명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동학혁명은 비로소 제대로 된 평가를 받게 됐습니다. 그러나 앞서 보신대로 동학의 성지는 엉터리 투성입니다. 동학관련 단체, 후손, 지역주민, 지자체 모두 반성해야 합니다. 이제라도 엉터리 시설은 철거하고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팩트TV는 이후로도 관심을 갖고 지켜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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