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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술인터뷰]김용철감독편 - 1화 올해 우승팀은
등록날짜 [ 2013년05월08일 17시19분 ]
신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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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술인터뷰]김용철감독편 - 1화 올해 우승팀은
 
 
※최대한 인터뷰 느낌을 살리기 위해 사투리를 그대로 표기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내용에 따라 원래 의미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변형한 곳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랑은 은하수 다방 문 앞에서 만나 홍차와 냉커피를 마시며 매일 똑같은 노래를 듣다가 온다네 - 10cm의 사랑은 은하수 다방에서 가사中
 
네 번째 술술인터뷰는 가수 10센치가 사랑을 만나던 홍대 인근의 은하수 다방에서 진행됐다. 이날 손님은 야구계의 살아있는 신화이자 전설의 4번 타자, 대한민국 프로야구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김용철 전 경찰청야구단 감독이다.

먼저 김용철 감독님에 대한 소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롯데자이언츠 전설의 4번 타자와 삼성라이온즈의 해결사, 경찰청 야구단의 초대 감독이었던 김용철 감독님은 광산김씨로 부산이 고향이시고 부산상고 재학시절 밀어치기를 잘하는 교타자로 이름을 알리셨습니다. 한일은행 실업야구팀 입단 첫 해, 전반기에만 홈런 4개를 치면서 그 해 국가대표로 발탁이 되십니다. 1982년에는 롯데자이언츠의 창단선수로 프로 입단을 하셨습니다. 이때부터 한국 프로야구의 부흥기를 선두에서 이끌며 남성 야구팬에게는 중장거리 타자로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트레이드마크인 구레나룻으로 수많은 여성 팬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습니다. 1988년 골든글러브를 수상하셨고요, 올스타는 무려 7회나 선정되셨습니다. 1992년 선수생활에서 은퇴하신 뒤  삼성 라이온즈와 현대 유니콘스의 타격코치를 지내시고, 2003년 롯데의 감독 대행을 거쳐 2005년에는 초대 경찰청 야구단의 감독직을 맡으셨습니다. 지금도 야구 전문가들이 말하는 가장 완벽한 타격 폼을 가진 명실상부한 최고의 타자이자 전설중의 전설이십니다.
 

김용철 감독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야구는 언제부터 하시게 됐나요?
 
부민초등학교에서 3학년 말부터 시작을 했어요. 그런데 야구팀이 없어지는 바람에 남부민초등학교로 전학을 가서 4학년부터 6학년 까지 야구를 했는데 또 없어졌어요. 그래서 6학년 때 동광초등학교로 가서 야구로 졸업을 했습니다.
 

그 당시에 야구도 하고, 집에서 글러브도 사줄 정도면 집안 형편이 괜찮았다는 이야기일까요?
 
집안 형편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 나이에 먹고 살 정도를 판단할 정도면 제가 있겠습니까?(웃음)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정말 좋은 글러브를 사주셨는데, 그걸 끼고 가니까 중학생 선배가 와서 “야 글러브 좋다. 잠깐만 껴보자”해놓고는 잠깐만이 영원히 에요. 그 당시에는 선배들이 보자 그러면 무조건 줘야 되고, 좋은 글러브를 가지고 있으면 손타기 마련이었죠.
 

어릴 때 동네야구를 보면 제일 잘하는 사람이 투수도 하고, 잘 치기고 하고 그랬잖아요?
 
3번이나 4번 타자가 투수도 하고 그랬죠. 제가 초등학교 때도 야구는 잘 했는데 희한하게 투수는 안 했어요. 그러다 중학교를 가서 투수를 잠깐 하는데 키가 안 크는 겁니다.. 초등학교 키가 중학교 졸업할 때 까지 그대로였어요.
 

부산상고에서 실업팀인 한일은행에 입단을 하시고, 바로 4번 타자를 하셨어요. 부산상고 시절 그렇게 두각을 나타내지는 않았다고 하시던데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당시 운동특기생들 한태 한일은행은 제일 잘 하는 선수들만 가는 데였어요. 한일은행 자체가 국가대표 선수들로 구성됐다고 보시면 되요. 제가 썩 잘하지는 못했는데, 졸업하는 해 황금사자기 우승을 했어요. 그래서 대학이나 실업팀 눈에 들었었는데, 사실 지금은 한화 감독이신 김응룡 당시 한일은행 감독님이 무서워서 가게 됐어요. 그 분이 지금은 나이가 드셔서 얼굴도 온화하게 보이고 그러는데, 젊었을 땐 저보다 덩치도 크고, 얼굴도 보면 좀 무서웠어요.
 
김 감독님이 오셔가지고 “어디가? 내가 해줄게! 여기 도장 찍어!” 그러셔서 안 찍으면 맞을 것 같더라고요.(웃음) 아버지께서는 대학에 가라고 하셨는데, 저는 야구욕심이 있기도 했고, 짧은 머리로 은행에 가면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딱 들어서 “그래, 은행가자!”그래서 공포심에 조금 질린 것도 있지만 제 의지로 도장을 찍었습니다.
 
입단할 때 훌륭하신 강병철 선배님이 3루수에 4번 타자를 하셨고, 임신근, 최남수, 강문길, 홍경태 진짜 멤버들이 좋았어요.. 지금 경찰청야구단 감독인 유승안 씨도 거기 있었고, 그 때 제가 갔을 때 3루수라서, 강병철 감독님께서 3루를 보다가 1루로 가셨어요.
 
 
최고로 잘하는 팀에서 4번 타자 하셨다는 것은 자기 자랑이신 거죠?(웃음). 강병철 감독님은 밀려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나중에 혼나요. 양보하셔서(웃음) 내가 밀어 낸거죠. 그래서 제가 3루를 보면서 4번 타자를 했고, 그 해 대표선수가 됐어요. 그렇게 잘하는 사람 봤습니까?(웃음) 고등학교 졸업하고 만 19세 때 대표선수가 됐으니까요.

 
실업야구에서 이렇게 맹활약을 하셨는데요. 프로야구에 입단하신 계기가 따로 있으신가요?
 
그 때가 아마추어 야구에서 프로야구로 넘어가는 시기였거든요. 그 3년 인가 4년 전 쯤 될 것 같은데, 82년도에 미국 재미교포가 한국에 와서 프로야구를 만들겠다고 해서 언론에 난 적이 있었어요. 나는 그 때랑 똑같이 이야기만 하다 말겠지 했는데 실지 언론에서 몰아가는걸 보니까 아 진짜 생기겠구나 싶었죠. 그 땐 누구나 다 프로야구 가고 싶죠. 가야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저는 고민 안했습니다. “프로야구 갈  사람?”하고 물어 보기에 바로 손들었죠. 그랬더니 바로 “사표 내!” 그러더라고요.
 

지금으로 말하면 권고사직 당하신 거네요. 그러면 당시 프로야구로 가시면서 연봉에 차이가 많이 났나요?
 
75년 10월인데요. 제가 처음 고등학교 3학년에 촉탁으로 한일은행에 들어갔을 때 5만원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군대 가기 전에는 24만원, 군대 갔다 오니까 34만원 주더라고요. 그런데 프로 가니까 단위가 숫자가 3개로 딱 늘어났어요. 10만원에서 100만원으로 딱 늘어났죠. 당시에는 컷죠. 당시 100만원이면 81년도에 이사들 월급이 100만원 이었거든요.
 

그렇죠. 81년도 대학 등록금이 아마 100만 원 정도 했으니까, 지금 등록금이 500만 원 정도 된다고 하는데 비교해보면 큰 돈 이죠. 그런데 야구전문가로서 올 해 우승팀은 어디가 될 것 같으세요?
 
올해 우승팀은.....몰라요(웃음) 몰라요. 누가 알겠어요. 솔직히 딱 까놓고 말하자면 세 팀 정도 있어요. 삼성, 기아, 두산. 문제는 우승 후보보다 밑에 세 팀의 실력이 너무 떨어진다는 거예요. 극과 극을 달리면 안돼요. 흥행은 라이벌이다 견제다 이렇게 해야 하는데, 밑에 팀들이 그걸 받쳐줘야 프로야구가 사는 거예요. 하위 팀이 그냥 하위 팀이 아니에요. 하위 팀이 최선을 다 해야 위에 팀이 살고 그러는데. 우승팀을 맞추라고 하면 특정 팀을 이야기해야 돼서 그건 안 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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