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술인터뷰]김용철감독편 - 2화 응답하라 1987. 최동원vs선동렬
1987년 하면 보통 민주화투쟁만 생각하게 되는데요, 감독님에게는 최동원과 선동렬 선수의 명승부가 있던 해로 기억되겠네요. 그 때 경기하면서 최류탄 냄새 많이 맡으셨겠어요?
광주, 부산...서울에서도 한 번 맡았었 것 같아요. 하이튼 뭐 요동치는 해였죠. 특히 광주에서 많이 맡았던 것 같아요.
30년 넘은 야구 역사에서 롯데와 해태의 명승부는 ‘퍼펙트게임’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질 만큼 대단했는데요. 김용철 감독님을 의리파로 굉장히 잘 그렸던데요. 그 감독님이랑은 혹시 친분이 있으신지요?
사람 우사(웃음거리가 되게 하다) 다 시킨 거지 뭐. 박일문 감독님이 꼭 실명을 쓰겠다고 해서 처음에는 거절했어요. 그런데 시나리오를 보니까 정말 괜찮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에 시나리오 보고 실명 쓰라고 그랬거든요. 그리고 나서 대본을 가져왔는데, 내 분량은 많은데 너무 웃기는 역할이에요. 그래서 내 이름 좀 뜨겠구나 싶었지. 그런데 실지(실제로) 영화 나온걸 보니까 완전히...그게 팩트는 아니고 영화 관객들의 흥미 요소 때문에 그랬는데. 그렇다고 일곤이 형하고 화장실에서 싸우고 얻어터지고 그런 건 없어요.
전에는 롯데 야구버스가 광주에 가면 불안감을 느끼거나, 해태 팀이 부산에 가도 그렇고. 지역감정 때문에 그런 어려움이 많으셨을 것 같은데요.
그때 야구를 하면서 지역감정이 제일 심했던 것 같아요. 눈을 돌리려고 만든 게 지역감정을 더 부추기게 했고. 시절이 지나서 보면 괜찮은데, 그 당시에는 굉장히 그냥 싫은 거였죠. 우리가 가면 그쪽이 싫은 거에요. 그쪽에서 오면 우리도 굉장히 싫어했고. 쉽게 이야기해서 큰 이슈가 있는데 다른 이슈로 뭍혀 버리는...결과는 좋아졌지만 이렇게 시작되지 않았나...
당시 최동원 선수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있으면 해주세요
정말 게임에 열중하는 선수에요. 한 게임을 위해서 최선을 다 하는 선수. 저랑 가끔 와인도 한 잔 하고. 그 당시 최동원 선수는 와인을 즐겼어요. 조금 수준이 높은 음주문화 생활을 하고 있었죠. 특히 과하게 먹지 않고 카페에 앉아서 한두 잔으로 끝내는 선수였어요. 자기 관리를 무척 잘하는 선수에요. 물론 그렇게 하니까 주변에 여자도 많고 남자 팬들도 많아서...다 소문이에요. 소문이 새끼손가락이면 내 귀에 들어올 때는 엄지 손가락이 돼서 들어오는 거거든요. 그런 과정을 그 선수들이 다 겪었다는 거에요. 최동원 선수를 깨놓고(까놓고) 이야기 하면 야구를 위해 태어서서 한 게임을 위해 다 하는 선수다 라고 알고 있거든요. 나 하고 같이 생활을 했기 때문에 모르시는 부들이 가끔 그런 이야기를 하죠.
그러면 최동원 선수하고 선동렬 선수하고 서로 장단점이 있을 텐데요. 스타일을 비교해본다면?
둘 다 훌륭한 선수였는데 최동원 선수는 다이나믹한 선수고, 선동렬은 섬세한 선수다. 체격으로 보면 반대인데 최동원은 굉장히 다이나믹했어요. 투구 폼이라든지, 야구 스타일이라든지, 공격적인 투구를 했어요. 반면에 선동렬 선수는 아주 섬세하게. 쉽게 이야기 해서 머리 좀 썻죠. 칠라고 하면 변화구 던지고 했는데 그 영향이 포수에게 있는 거에요. 포수가 타자들을 상대하면서 이 선수한테는 이때 직구 던지면 맞겠다 싶으면 변화구 던지고, 이 선수가 변화구를 노릴 때 과감하게 직구로 승부해야 된다는 이런 생각의 차이가 있었어요.
말하자면 최동원 선수는 맞더라도 한번 세게 던지는 선수고, 선동렬 선수는 안맞으려고 최대한 포수가 원하는 대로 던지는 선수였다는 말로 정리가 될까요? 선동렬 선수는 맛만 보여주고 반대쪽으로 가고, 최동원 선수는 맞더라도 또 던지는 선수죠. 그게 제가 선수생활을 할 때 느낀 거죠.
그럼 이제는 김용철 감독님 이야기로 다시 돌아와서, 개인통산 1024경기에 출전하셨고 타율은 2할 8푼 3리, 968안타, 131개 홈런 등 쟁쟁한 기록과 실력에 비해서 MVP 같은 상복은 없으셨던 것 같은데요?
꽤 괜찮타 생각해요. 내가 그렇다고 나를 나쁘다고 이야기 할 수 있나?(웃음) 그 당시에 야구하면서 나름 최선을 다 했으니까 꽤 괜찮았다고 생각해요. 내가 상 받은 것 중에 기억나는 거 있으세요?
골든글러브 7회요
그거 말고요. 패넌트레이스에서 상 받은 게 있는데. 프로야구 최초의 ‘승리타점상’을 제가 받았어요. 그리고 그 다음에 없어졌어요. 결정적인 승부에서 1:1로 가다가 내가 2타점을 올렸다는 게임으로 받았어요. 내가 그 정도로 찬스에 강했다는 것이지.
1984년 롯데를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고, 계속 승승장구 하실 줄 알았는데, 1988년 선수협 결성에 앞장서면서 최동원 선수하고 삼성으로 트레이드 되는 등 선수생활에 제동이 걸리게 되시는데요. 그때 심정이 어떠셨나요?
나빳죠. 그런 자체가 생기면 불안해서...기업들은 ‘내가 하고 싶은 게 아니다, 전 모 씨 때문에 억지로 끌려서 했는데, 너희들 까지 왜 이러느냐‘ 이런 분위기였거든요. 처음에 트레이드 돼서 갈 때는 나보다 앞서 최동원이 김시진하고 트레이드 됐잖아요. 그땐 이거 뭐 이런 일이 다 있어? 솔직히 경상도 말로 “쎄리 다 빳뿌까 마” 이렇게 생각 했거든요.
며칠 있다가 내가 되뿐거에요. 새벽에 전화를 받았어요. 아침 8시면 선수들 한테는 새벽이에요. 야간 11시에 경기를 마치고 보통 1~2시에 잠들기 때문에 11시 까지는 자야 하는 거에요. 새벽에 전화를 받아가지고, 와이프한테 “내가 삼성으로 트레이드 됐단다. 구단에 오늘 아침 들어오란다” 그랬지. 그랬더니 집사람이 “롯데보다 삼성이 낫다 아이가. 롯데만 있을 거는 아니지 않느냐. 트레이드라는데 어차피 결정난거다 이거는. 삼성 가서 한 번 해보면 괜찮다”고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그래서 그 짧은 순간에 그래 가서 함 해보자 하고 판단을 했지. 후회는 안 해요. 정말 잘 갔어요. 롯데 팬들에게는 섭섭하게 들릴지 모랐지만, 그 때 삼성 가서 선수생활 하면서 느낀거는 정말 잘 갔다. 내가 야구를 계속 해야 하니까. 그래서 그 트레이드는 마음으로는 섭섭했지만, 선수 생활하기는 정말 괜찮았어요. 문화가 틀리잖아요.
문화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사실 롯데 응원문화가 대단하지 않습니까? 김 감독님이 보시기에 언제부터 독특한 응원문화가 나왔다고 생각되세요?
응원문화라는 건 팬들이 열광할 때 생기는 거거든요. 그 열광의 시초가 롯데 자이언츠라고 보시면 되죠. 그렇게 열광적으로 응원하는 팬들이 어디 있습니까? 열광적인 팬들이 자연스럽게 응원을 만들려고 하다 보니까 롯데만의 독특한 응원문화가 생긴 거잖아요. 또 경상도 특유의 발음 표현 있지 않습니까? 마, 쫌, 뭐...여러가지. 와이라노 이렇게 이야기 하는 문화가 그대로 계승 되서 독특한 응원문화가 만들어지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러고 보면 사투리를 쓰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게 구호가 되서, 그게 전 국민이 호응하는 문화가 되지 않았나 싶고, 거기에 선도적인 역할을 롯데 팬들이 했다고 볼 수 있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