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 전에>
잊지 못할 대구여. 지금은 모르지만, 7~80년 전 대구에는 ‘녹향’이라는 음악다방이 있었다. 그곳에 자주 들렀고 베토벤, 차이콥스키, 슈베르트를 들었다. 매형이 그곳의 국책은행 간부였기에 방학 동안 자주 들렸다. 물론 용돈도 궁했기 때문이다. 나는 부산 공병학교에서 교육을 마치고 부대배치를 받을 때 우등생의 선택권으로-모두 내가 고향인 서울을 지망할 줄 알았다-대구를 택했다.
이유는 내가 끔찍하게 좋아하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이상화 시인이 태어난 곳이자 이상화 시비가 달성공원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음에 둔 은행원과 다시 ‘녹향’에서 음악을 듣고 싶다는 유치한 낭만 때문이었다. 그러나 훈련병 신세로 기록카드 한 장 달랑 들고 대구에 떨어진 나는 혈혈단신 홀몸이고 쭉지 빠진 참새 새끼였다.
“철부지야. 그럴 줄 몰랐더냐” 아무리 후회해도 해는 이미 서산을 넘었고 그 해가 언제 다시 떠오를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심산유곡에 홀로 떨어진 도토리 한 알. 이것이 내 신세였다. 온갖 잡일은 내 몫이었고 밤에 나를 기다리는 것은 불침번이다. 추운 겨울날 부대 옆 개울가에서 총을 들고 불침번 서다 달빛이 흐르는 개울물을 보며 울었다. 왜 내가 대구에 왔던가. 서울에 배치됐으면 이렇게 외롭지는 않았을 텐데. 누구 하나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원래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들 아닌가. 밤 새워 불침번 선 다음날 나를 기다리는 것은 온갖 잡일과 사역이다. 하소연할 곳도 사람도 없는 ‘인간 이기명’ 나는 혼자였다. 고독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탈영도 생각했지만, 얼른 머리에서 지웠다. 그런 치사한 짓은 죽어도 안 한다. 아니 못한다. 적어도 럭비선수 아닌가. 특무대 몽둥이와 경찰고문도 견뎌낸 내가 아니더냐. 이를 악물었다. 이상화의 시도 머리에서 까맣게 사라졌다.
■나는 버림받지 않았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천국이 나의 것은 아닐지라도 나는 참는 미덕을 배웠다.
부대에서 사역하는데 부대장 당번병이 나를 찾는다. 이게 무슨 일인가. 나는 죄진 놈처럼 당번병의 뒤를 따라갔다. 부대장실 문을 열어주며 들어가란다. 문을 열었다. 쭈뼛쭈뼛 흙 묻은 군화를 들이미는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거기 부대장과 함께 활짝 웃고 있는 한 장교님이 계셨다.
“기명아!”
“아저씨”
“짜식. 아주 새까매졌구나.”
당숙은 부대장과 군대 동기생이었다. 내가 대구로 전출됐다는 소리를 듣고 어머니가 연락한 것이다. 세상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단 말인가. 당시는 자유당 시절이다. 빽이면 안 통하는 것이 없었다. 천국을 가보지 못했지만 이보다 좋을 수가 있을까. 참나무 장작처럼 무뚝뚝하던 경상도 사나이들이 이처럼 상냥할 줄이야. 입에 혀처럼 나긋나긋했다. 나는 아무 곳에나 누구에게나 절을 하고 싶었다.
일요일이 왔다. 꿈도 못 꾸던 외출이다. 달성공원에 갔다. 거기 이상화의 시비가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가 아닌 ‘나의 침실로’다. 이상화 최초의 시이기에 비를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가슴속에서는 흐르는 눈물과 함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외우고 있었다.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닦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냥 감격스러웠다. 이것이 자유로구나. 자유란 이렇게 좋은 것이로구나. 자유란 목숨을 버리고 지킬 가치가 있구나.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앞에서 돌 던지며 ‘이승만 독재타도’를 외치던 지금 자유의 고마움을 절감하고 있다. 대구라면 자유당 독재정권 때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최초로 한 곳이다.
대구는 민주의 상징 같은 도시다. 거기 달성공원에서 나는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몸은 오는가’를 외우며 울고 있는 것이다. 새까만 이등병이 이상화의 시비 앞에서 솔방울 같은 눈물을 뚝 뚝 떨구는 모습이 이상했는지 공원에 놀러 왔던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본다. 속으로 부르짖었다. 니들이 내 맘을 아느냐.
그날 나는 달성공원에서 마음껏 울면서 자유를 누렸다. 녹향에도 들려 차이콥스키의 1812년 서곡을 들었다. 서곡에서 가슴을 두드리는 북소리. 지금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북소리가 들린다. 이 북소리는 민주주의를 부르는 국민의 소리다.
경고한다.
입으로만 개혁을 외치는 반민주주의자와 개혁주의자들이여.
국민의 인내는 한계가 있다. 참는 것도 정도 문제다. 이 말의 의미를 알 것이라고 믿는다.
이기명 팩트TV 논설위원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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