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 전에>
대통령의 신년사가 나왔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개혁’이란다. 개혁이라니 얼마나 좋은 말인가. 정말 개혁할 것 투성이다. 그러나 가슴에 와 닿는 개혁이 없다. 내 인심이 고약해서 그런가.
‘노동·교육·연금’의 3대 개혁을 하겠단다. 그는 3대 개혁을 신속히 추진하겠다고 언명했다. 아니 약속했다. 좋다. 한데 왜 아쉬움이 남는가. 지금 국민이 간절하게 소망하고 그 자신도 너무나 잘 아는 개혁이 있다. 주변을 깨끗이 정리하라는 것이다. 자기 몸이 지저분하면 남에게 깨끗이 하란 소리 못한다. 무슨 소린지 알아듣는가. 부인 김건희 여사의 ‘주가 조작’ 의혹을 모르는 국민이 없다.
김건희 주가조작 의혹은 설사 지금 이런저런 조건으로 덮는다 해도 언젠가는 반드시 터진다. 세상이 원래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다. 국민도 침묵하지 않는다. 신년사 말미 아주 조그맣게라도 그 문제를 포함했다면 국민은 모기 손바닥 정도로 칠 수 있는 박수라도 보내지 않았을까. 대통령의 지지율이 날이 갈수록 엉망이다. 미국 여론조사 기관인 ‘모닝 컨설트’ 발표에 의하면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이 세계 22개국 지도자 중 22위, 꼴찌다. 뒤에서 1등이다. 만약 신년사에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과하면 국민의 생각은 달라졌을 것이다. 특히 이상민 행안부 장관의 목을 자른다면 지지율이 얼마나 오를지 예측불가다. 나아가 한동훈의 전횡을 막을 아무런 방안도 없단 말인가. 지도력의 문제다. 너무 재수 없는 소리만 한다고 화내지 마라. 내게는 글 쓰는 죄밖에 없다.
■그런대로 잘 견딘 군대생활 출발
논산훈련소 훈련병 생활도 끝나간다. 이제 어딘지도 모를 후반기 교육이 시작되는 것이다. 어느 특과학교에 가게 될 것인가. 모두 부관학교에 가기 위해 애들 썼다. 부관학교는 군의 인사 관련 교육을 받는 곳이다. 이른바 빽 좋은 애들이 영천에 있는 부관학교로 갔다. 난 가만히 있었다. 어디를 가나 졸병 생활이 거기서 거기 아니겠는가. 가만히 있던 나는 가장 고생이라는 공병학교에 떨어졌다. 경남 구포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군기가 엄하기로 유명했다. 나는 공병학교(일명 골병학교)에 떨어졌다.
공병학교는 역시 달랐다. 하사관(지금의 부사관)들이 훈련병(특과교육생)에게 호랑이였다. 외출도 일체 금지. 훈련소에선 공병학교에 가는 훈련병들에게 ‘너 죽었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자신이 있었다. 군대에서 살아남은 방법은 규칙을 잘 지키면 되는 것이다. 공병학교에서는 교육생 기록카드(이력서)를 이미 검토했다. 내 논산훈련소 경력도 다 알고 있었다. 중대장이 날 불렀다. ‘넌 성적도 좋아서 좋은 특과학교에 갈 수 있었는데 왜 고생바가지인 공병학교에 왔는가.’ ‘군대에서는 명령대로 하는 거 아닌가요.’ 이놈 봐라. 하는 표정이다. ‘음 아주 평가가 좋았군. 좋아 우리 중대에서도 중대 향도를 맡아라.’ ‘네. 알겠습니다.’
공병학교의 중대 향도. 즉, 반장이 된 셈이다. 역시 ‘특권쫄병귀족’이다. 교육훈련은 가혹했다. 다이너마이트 폭파, 암벽 폭파, 야간 교량설치 등 지금 하라면 죽는다고 해도 못할 훈련이다. 앞장서 교육병을 이끌었다. 나는 모범 교육병이었다. 그러나 어디든 사고 치는 사람이 있다.
교육생은 일체의 외출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일요일 한 녀석이 기간 사병 옷을 빌려 입고 외출한 것이다.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걸렸다. 그 녀석에겐 벌칙이 내려졌는데 ‘석공장’ 작업이다. 석공장은 바위를 깨서 운반하는 작업인데 최고의 고역이었다. 명령이 떨어졌다. 그런데 인연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다. 그 녀석이 내가 KBS 근무할 때 나타난 것이다. 웬일이냐고 물었더니 KBS로 발령받았단다. 그 녀석의 고모부인가 뭔가가 당시 국회의원이었는데 그 빽으로 대전서 서울 발령을 받은 것이다. 어쨌든 반가웠다. 당시 KBS는 공무원 조직이다. 나는 보도국으로 가고 싶다는 그 녀석 부탁을 들어줬고 수단 좋은 놈이라 기자 한다고 껍쩍대더니 나중에 부장도 되고 앵커 노릇까지 했다. 그러니 당시 KBS 앵커 수준이 오죽했겠나.
평가도 제대로 받지 못하던 그는 정치한다고 설치더니 국회의원 꿈까지 꾸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다. 여기저기 다니더니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와 나이가 비슷하니 글쎄 모르겠다.
당시 KBS 보도국 수준은 딱 그 정도였다. 난 그때 기자라고 하던 애들을 기억한다. 그 시절 KBS는 편성과에 보도계가 속해 있었고 기자 수가 겨우 7명이었다. 필생(筆生)이라고 하는 가리방(기사 베끼는 철판) 긁는 친구를 빼면 6명이다.
그 가리방 긁던 친구는 나중에 KBS가 한국방송공사로 기구가 확대 개편되어 보도국이 엄청나게 커지고, 최XX가 사장이 되는 시간을 거치면서 이사인지 뭔지 간부가 됐다. 그래서 사람 팔자 시간문제라고 하는 모양인데 나는 시간도 없고 욕심도 없으니 이제 다 틀렸다.
■대구와의 인연.
공병학교 향도 생활은 잘 지냈다. 인사계가 사람은 좋지만, 가방끈이 짧았다. 마침 연애를 하던 여성이 있었던 모양인데 하루는 내게 다정하게 부탁을 해왔다. 편지를 써 달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연애편지 대필이다. 내가 글을 쓴다는 얘기를 들은 모양이다. 누구 영이라고 거역하랴. 정성을 다 해 최고(?)의 명 연애편지를 써 주었다. 며칠 후 입이 딱 벌어졌다. 아마 여성에게 엄청난 찬사를 들은 모양이다. 다음부터 인사계가 나에게 하는 대우는 중대장급이었다.
교육생들 사이에서도 나는 인기가 좋았다. 단체기합을 받으면 모든 책임은 중대 향도에게 있다면서 나는 몽둥이 맞기를 자청했고 애들은 기압을 면했다. 세상사란 내가 베푼 만큼 받는 모양이다. 정치도 그렇다. 주X영, 권X동 등 이른바 ‘윤핵관’이라고 불리는 정치인들도 내가 보기에는 저리 가라다. 그들에게 지역이라는 혜택과 권력의 충견이라는 배경이 없었다면 누가 돌아보기나 하겠는가. 그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실력으로 살아가야 한다.
공병학교를 1등으로 졸업했다. 우등생의 특권은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의 부대로 배속받는 것이었다. 교육생들과 교관들은 내가 당연히 서울로 갈 것으로 생각했다. 중대장이 물었다. 내 대답은 대구였다. 너무나 뜻밖인 모양이다. 멀뚱히 나를 쳐다보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나도 돌아이였다. 왜 내가 대구를 선택했을까. 그건 순전히 ‘이상화 시인’ 때문이다. 나는 정말 이상화 시인을 좋아했다. 특히 그의 시 ‘나의 침실로’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내 애송시이기도 했다.
그래도 고향과 부모, 친구가 모두 있는 서울을 두고 대구를 택하다니 남들은 도저히 이해 가지 않을 것이다. 이유는 또 있었다. 내 고등학교 시절 매형이 한국은행 대구지점 간부였다. 방학 때면 대구에 내려와 시간을 보냈다. 대부분이 대구 경북여고 출신인 은행원들은 출중한 대구미인이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내가 마음에 둔 은행원도 있었다. 고등학생인 내가 은행원을 마음에 두다니. 나도 간도 어지간히 부은 놈이었다.
남들이 생각하기에 말도 안 되는 이런 이유로 대구를 선택한 나는 대구 제5군관구사령부로 명령이 났다. 새까만 이등병이 기록카드 한 장 달랑 들고 대구로 갔다. 집에서도 깜짝 놀랐다. 그러나 어떻게 ‘이상화 시인’과 대구 경북여고 출신 은행원 얘기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머님은 눈물을 흘리셨다. 이래저래 난 불효가 막심한 놈이다. 지금도 꿈에 어머님을 뵈면 용서를 빈다.
이기명 팩트TV 논설위원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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