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TV-이기명칼럼】 인간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기억이 있다. 생각나는 기억과 잊어버린 기억들. 가슴속에 살아있는 기억은 소중한 기억일 수 있다. 중학교 때부터 영어와 수학은 젬병이었다. 변명 같지만, 기초를 다져야 할 때 6·25전쟁이 터졌고 피난살이에 공부는 고사하고 배운 것이라고는 술과 담배였다. 국어와 역사만은 날고 기었다. 책을 많이 읽은 덕이다.
고등학교 때 수학 시간이다. 선생님은 열심히 강의하시는데 내 귀에는 ‘소귀에 경읽기’고 난 책상 밑에 연애소설을 펼쳐놓고 있었다. 그때 공부 잘하는 내 짝 녀석이. ‘야아. 지금 선생님이 복잡하게 가르치시는 수학문제 아주 간단히 풀 수 있다’ ‘뭐라고? 그럼 선생님한테 얘기해.’ ‘안 돼. 선생님이 무안하실 거 아니냐?’
그 다음 수학 시간이다. 선생님의 말씀이다. 어떻게 아셨는지 ‘내가 너희에게 사과할 말이 있다. 지난 수학 시간에 내가 복잡하게 가르친 문제가 실은 아주 간단히 풀 수 있는 문제였다. 바로 아무개가 풀었다. 그 녀석은 내가 창피할까 아무 소리도 안 했다. 정말 미안하고 고맙다.’
내 친구는 무안해서 얼굴이 벌게졌다. 훌륭하신 선생님이다. 아무 소리도 안 하셨으면 누가 알겠는가. 제자보다 실력이 부족했다는 소문을 감수한 선생님. 지금도 잊지 못한다.
■피난민 고학생
그 친구는 1·4 후퇴 당시 개성에서 16세로 혼자 피난을 왔다. 위장이 안 좋았던 그는 부모님이 객지 생활하며 고생하면 병이 낫는다며 어린 아들을 혼자 피난 보냈다. 한 달 정도면 다시 수복하리라던 국군은 오지 않아 그는 이산가족이 됐다. 먹고 살길이 막막했던 그는 지금의 용산역 인근 미군 부대에서 하우스보이를 했다. 워낙에 착실했던 녀석이라 미군부대장이 낮엔 학교 다니게 했고 밤에만 ‘하우스보이’ 일을 했다. 왜 내가 그 친구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을까. 공부라면 날고 기던 가난했던 착한 친구와 반에서 주먹이라면 알아주던 나다. 우리 둘의 인연이란 묘한 것이다.
학교에서 시험이 있으면 누구나 내게 정답을 일러줬다. 한데 이 친구는 딱 거절이다. 뿔이 난 나는 녀석을 밖으로 불러냈다. 녀석은 떨었을 것이다. 한데 어럽쇼. 나를 정면으로 보며 녀석이 하는 말은 ‘때릴 테면 때려 봐?’ 이런 세상에. 내 주먹을 무서워하지 않은 놈이 있다니. 오히려 내가 질렸다. 다음은 그 녀석에 대한 존경이고 고마움이다.
어느 날. 그 녀석이 무심코 한 말. “넌 좋겠다. 항상 부보님과 함께 살고 있으니” 그 녀석의 눈물을 보았던가. 아니 눈물은 내 가슴에서 흘렀을 것이다. 그날 밤. 나는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가정교사로 집에서 같이 있겠다고. 집에서 왕인 막내아들이 공부한다고 가정교사를 두겠다니. 대찬성이시다. 몇 번을 거절하던 그는 나의 위장 가정교사가 됐다. 녀석은 특대생이라 돈 한 푼 안 들었다. 처음에는 뜨악하시던 부모님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녀석을 나보다 더 사랑하셨다. 내 성적은 어떻게 됐느냐고? 원래 난 잿밥에는 생각이 없었다. 더구나 난 한창 럭비에 몰두해 있지 않았던가. 우리 집안에서 그 녀석에 대한 평가는 자자했다. 내가 어떻게 그런 친구를 사귀었느냐고. 난 지금 속으로 웃는다. 그래도 내가 사람을 보는 눈은 있다고. 그 녀석 덕에 난 영어도 읽게 됐다.
그 녀석은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군의관으로 복무를 마친 후 미국으로 유학, 미국 동부에서 심장내과의 저명한 의사이자 교수가 되었다. 지금 90이 됐는데도 제 할 일을 한다. 한국에도 그를 아는 의학자들이 많다.
그가 미국의 한 의과대학에서 책임자로 있을 때 한국에서 가장 유명하던 앵커 S씨가 미국유학을 갔다. 서로 교분을 맺었고 참으로 보기 좋았다. 내가 언론민주화니 노무현후원회장이니 하는데도 그는 늘 웃으면서 하는 말.
‘너 참 대단하다.’ 그때는 독재 시절이었다.
■스승과 제자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사실 스승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 부모님이 나를 낳아 길러 주셨다면 스승은 인간이 되게 해 주신 분이다. 좋은 스승을 만난 인간은 좋은 인간으로 자란다. 어떤가. 요즘은 웃는 소리가 들린다. 슬픈 일이다.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스승 대접을 제대로 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 힘들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선생님의 말씀은 호랑이보다 더 무서웠다. 선생님 말씀은 들어야 하는 명심보감이었다.
‘혀를 물고 죽으라’라는 말이 무섭다. 혀를 물면 죽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혀를 물고 죽어야 할 인간이 가장 많은 곳은 국회다. ‘건방 떨지 말라’고 동료의원을 윽박지르는데 건방 떠는 인간은 바로 자신이다. 만약에 내가 경험한 스승과 제자의 경우가 지금 있다면 어떨까. 그런 상상은 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런 세상이 오기만을 빌고 또 빈다.
■정치인이 혀를 자른다면
오늘날의 정치는 조롱의 대상이다. 아니라고 할 정치가는 오라. 엎드려 절하겠다. 국회에서 상대 당 칭찬하는 것을 보았는가. 상대 의원의 말꼬리를 잡으며 쾌감을 느끼는가.
말도 되지 않는 객담(客談. 실없고 싱거운 말)을 여기저기서 적당이 잘라다가 이른바 균형이라고 맟추어 기사라고 쓰는 기자들은 그래도 학교에서 글이라도 좀 썼다는 친구며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는 똑똑하다는 친구들이다. 이들은 모두 바보로 만드는 것이 오늘의 정치다. 세상을 바로잡는 정론을 펴겠다는 꿈은 어디로 갔을까. 지금 그들은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할까. 조기퇴진이나 바라고 있지 않을까.
기자들은 자신이 쓴 기사를 결코 보지 않는다는 후배를 말을 들으면서 문득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과 내 친구를 떠 올리는 것은 세상물정을 모르는 내 탓이라는 것을 느끼며 그 선생님과 그 친구가 사무치도록 그리워진다.
이기명 팩트TV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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