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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우 칼럼] 살고 싶은 자! 죽여라?
등록날짜 [ 2014년04월09일 12시35분 ]
팩트TV뉴스 남태우 칼럼니스트
 
【팩트TV】현대인은 예전에 비해 엄청난 물질적 풍요를 누릴 수 있고 다양한 정보에 접근이 가능해 지면서 본인의 노력만 있다면 거의 무한에 가까운 지식을 쌓을 수 있고 놀이문화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환경에 살고 있다.
 
영화만 하더라도 이전에 비해 훨씬 다양한 포맷과 다양한 방법으로 즐길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행복감은 이전에 비해 결코 높지 않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풍요 속에서 피곤을 느끼게 하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행복감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빨리 빨리’에 익숙한 우리의 급속한 산업화에도 그 원인이 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생긴 공동체의 붕괴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이 가속화한 것은 무한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의 논리라는 패러다임으로부터 누구도 자유롭지 못한 사회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현대사회가 무한경쟁의 사회로 치닫게 된 것은 그 만큼 삶이 팍팍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치열한 경쟁의 구도에서 벗어나 좀 더 초연하고 자유로운 삶은 없을까라는 생각을 해 보기도 전에 우리는 이미 더 많은 그리고 더 강한 경쟁에 내몰리고 있다.
 

□경쟁과 공존의 선
 

일반적으로 사람은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본인이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알 수 없이 왔다가 언제일지 모르게 가는 것이 인생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것이 인생인데 이 인생이라는 소풍이 제한된 시간에 정해진 일을 하고 죽기 살기로 보물찾기를 해야 하는 것이라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길을 스스로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엄청난 경쟁을 뚫고 하나의 생명이 탄생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후로도 이렇듯 무한경쟁을 되풀이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과연 누가 이것을 재미있다 할 것인지 의문이다.
 
초등학생들부터 일제고사다 뭐다 해서 서열화를 강조하는 시스템에서 느끼는 행복감이란 자연스런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는 친구를 밟고 일어서야한다는 것 외에 무엇을 가르쳐 줄 수 있을까? 이렇게 자란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과연 타인을 배려하는 이타적 삶이 가치 있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을까?
 
대학생들이 다양한 꿈과 가치에 접근하지 않고 다수가 전공과 관련 없이 공무원이나 교사가 되기 위해 1학년 때부터 관련지식만을 달달달 외우고 있다면? 또한 비싼 등록금을 감당하지 못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고 지쳐 정작 수업시간에는 자느라 풍부한 교양도 깊이 있는 전공지식도 쌓지 못하고 살아가야 한다면?
 
교사들도 교원평가차원이 아니라 실적에 따라 성과급을 나누어 동료의 몫을 빼앗아야만 생존할 수 있게 하고 회사에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누어 정글의 법칙을 강요한다면?
 
이러한 가치가 21세기를 지나 꾸준히 지속된다면 우리는 점 점 행복보다는 비애라는 단어가 더 익숙하지 않을까? 어디까지가 경쟁이고 어디까지가 공존인가를 정확히 예측하거나 정할 수는 없다.
 
적절한 경쟁이 긴장과 활력을 불어넣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의 승자독식 무한경쟁이라는 이 패러다임은 그 끝이 행복과는 거리가 멀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이 룰을 정한 자도 이 룰에 이끌려 가는 자도 모두 마치 신의 법칙인양 누구도 벗어나지 못하고 가고 있다. 이 비극을 당연시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
 

□리얼리티 시청자, 콜로세움의 관객이 되다
 

최근 거의 모든 방송에서 상위권을 유지하는 프로그램은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일명 리얼리티다. 리얼리티가 없는 사회를 반증이라도 하듯 리얼리티를 강조하며 서바이벌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양산하는 형국이다.
 
가수도 아나운서도 탤런트도 다 이 서바이벌이라는 틀을 통해 찍어낸다. 심지어 남자친구도 여자친구도 이렇게 뽑아낸다. 뭐든지 안되는 게 없는, 인류가 개발한 최고의 발명품인양 찬양하며 사용한다.
 
앞서 언급했듯 신자유주의체제로 들어서면서 사회의 전 부분이 과당경쟁을 부추기는 사회다 보니 어쩌면 자연스럽게 이러한 흐름이 유지된 것 같다. 더욱 가속화된 경쟁을 부추기는 이 과열된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난립은 포장만 그럴싸하지 실제로는 UFC와 같은 격투기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덜한 경쟁이 아니다.
 
실제로 치고받고 싸우는 것보다 그 과정에서 경쟁자들이 서로 배신과 음모를 꾸미기를 부추기고 그들의 그런 모습을 보고 즐기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다. 그리고 승자를 뽑는 방식도 아닌 처절히 피 흘리기를 강요하며 패자를 죽이는 방식을 선호한다. 더 자극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마치 멘토인 양 보이지만 사실은 콜로세움에서보다 더 하게 혀로 독침을 쏘고 엄지손가락으로 생사를 결정짓는다. 그러자니 권력지향적일 수밖에 없다. 자신도 언젠가 그 자리에서 난투극을 벌여야하는 처지가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이러다가는 서바이벌로 가족도 뽑을 지경이다. 공부 못하는 자식도 퇴출시키고 돈 못 버는 가장도 탈락시킬 기세니 말이다. 이것이 진정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의 모습인가 싶다.
 
물론 우리만 이런 프로그램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유럽이나 미국에서 먼저 시작한 것이긴 하지만 굳이 우리가 미국보다 더 미국적으로 아니 죽기 살기로 이렇게 해야 하는가 말이다. 통속적인 표현이지만 어린 세대들이 이걸 보고 뭘 배울까 싶다.  
 

□독립영화여 손을 잡아라
 

전 사회를 휩쓰는 이런 과당경쟁은 정작 경쟁이 필요한 곳에는 별 경쟁이 없다. 정치권이 그러하고 대기업이 그러하다. 양당제도 아닌데 한국사회에는 다원적 가치와 이념이 설 자리가 없다.
 
형식적으로는 여러 정당이 있지만 실상은 양당제에 가깝다고 볼 수밖에 없다. 좀 더 다양한 세력들이 다원적 가치로 경쟁하면서 우리 사회의 미래를 개척해야 되지 않는가 말이다. 대기업의 독식은 이미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고용 없는 성장으로 자신들의 배만 불리고 젊은 세대를 도태시키는 구조 하에서 새로운 수요가 창출될 리 없고 이런 상황에서 서민경제가 살아날 가능성은 희박하다. 자신들만의 리그를 만들어놓고 다수의 사람들은 무한경쟁으로 내모는 것은 최소한의 매너도 없는 것 아닌가?
 
경주 최부자까지 거론하지 않더라도 상생을 위한 최소한의 노력만이라도 했으면 한다. 영화산업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메이저 몇 개의 기업이 모든 영화판을 좌지우지한다. 이런 과소경쟁이 장기적으로는 영화산업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기에 이 위험성은 크다.
 
할리우드조차도 이미 수십 년 전에 독과점을 금지했는데 우리는 영화판 자체가 완전히 독과점에 수직계열화 되어 있다. 제작이고 유통이고 모든 길은 한 곳으로 통한다. 이래서는 안 된다.
 
독립영화도 예술영화도 공존해야만 새로운 영화가 나올 수 있고 새로운 영화는 새로운 문화를 잉태한다. 살고 싶은 자, 죽여라! 가 아니라 살고 싶은 자, 손을 잡아라! 라고 말하는 상생과 공영은 21세기 한국사회에서 불가능한 가치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때다.
 
 
남태우 대구경북시네마테크 대표 / 팩트TV 뉴스디스크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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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우 칼럼]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2014-03-17 17:0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