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TV】2013년은 영화계가 최초로 총 관객 2억 명 시대를 달성해 풍성한 수확을 거둔 해다. 아울러 작품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영화들이 흥행을 이끌어, 내적으로도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평가도 대다수이다. 물론 상황이 이렇게 호전되었다고는 하나 영화계에 산적한 문제들이 해결했다거나 조만간 무언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전체적인 파이가 커졌으므로 무언가 의욕적인 시도를 해 볼 만 한 여지는 생긴 셈이다. 따라서 이러한 외형적 성장이 객관적인 호조건을 형성하고 있을 때, 이제는 우리 내면을 좀 들여다보자고 하는 것이 오늘 칼럼의 요지이다.
(사진출처 - 영화 '변호인' 포토티켓 이미지)
지난해 한국영화 흥행의 대미를 장식한 영화는 <변호인>이다. 이 영화는 지금도 상영되고 있으며 <해운대>를 제치고 역대 흥행영화 5위를 확보할 것이 확실시된다. 故 노무현 대통령의 인생 터닝 포인트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그 내용답게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흥행대박으로 이어졌고 일찌감치 ‘천만영화’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상식을 기반으로 한 진실과 정의의 승리라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소박한 서민에게 닥친 하나의 사건을 통해 보여준 이 영화는 그렇지 않아도 팍팍한 현실에 내몰린 많은 이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줬다. 또 故 노무현 대통령의 비극적인 삶과 맞물려 결국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극장으로 이끌었다.
문화적 동맥경화, ‘변호인’ 극단적 정치해석 내몰아
대중의 사랑을 듬뿍 받은, 외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이 영화는 그러나 정치적 해석에 따라 극단적인 반응들이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문화를 문화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정치의 도구나 무기쯤으로 생각하는 양극단들이 동시에 나타난 것이다.
한 쪽은 하나의 영화에 대해 영화적 평가와는 무관하게 엄청난 가치를 부여하고, 마치 이 영화만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대변하는 양 호들갑을 떨었다. 심지어 기필코 천 만 영화에 등극해야 한다며 사람들을 윽박지르기까지 했다. 자신들이 냉소해마지 않던 그 신자유주의적 무한경쟁의 링에서 1위를 하고 싶어 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은 평소 영화를 사랑해온 관객들의 입장에서 볼 때 영화를 하나의 정치이벤트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또 한 극단은 노무현 대통령을 소재로 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 마음대로 색깔을 씌우고 귀와 눈을 완전히 감아버리는 경우다. 어떤 변호사는 영화 <변호인>의 흥행 현상을 논하는 TV프로그램에서 좌익성향의 영화에 한 명의 스코어라도 보태줄 수 없어 보지 않았다며, 신의 손을 가진 듯 마음대로 영화를 재단하는 의기양양함을 과시한 경우도 있었다.
영화전문가도 아닌 분이 영화도 보지 않고 재단하는 이 신기술은 뒤틀려도 단단히 뒤틀린 그 정치적 편협함에서 원인을 찾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결국 정도차이야 있지만 모두가 평소에 건강한 문화를 자주 접하지 못하다 보니 생긴 일이라 할 만하다. 한 편의 영화를 통해 문화적 동맥경화에 걸린 그 공고한 사고의 경직성이 드러난 것이라 볼 수 있다.
부조리 말하지만, 상식적이진 않은 ‘일회성 이벤트’
이러한 아전인수식 편협한 사고가 판치는 것을 한편에 제쳐 놓고 이 영화의 배급과 상영과정을 살펴보자. <변호인>은 상업영화답게 대규모 개봉을 했고 아주 일반적인 수순을 거쳐 천 만 영화에 등극했다. 이것은 이 영화가 보편의 법칙을 따르기는 하지만 그 이면에 또 다른 한계를 드러냈다.
많은 영화인들이 현실에서 영화 배급과 상영이 가지는 문제점을 인식하고 이를 고치기 위해 대안을 제시하는 등 노력을 해왔음에도, 매번 동일한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성과 축적 없이 일회성에 그쳐왔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약자에 대한 사랑과 상식, 정의에 기반을 둔 비타협적 투쟁을 다루고, 많은 이들이 감동했지만 정작 영화는 영화계의 부조리를 상식으로 뒤바꾸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그저 거대 배급망과 멀티플렉스를 잘 활용해 흥행하면 그 뿐인, 극중 송우석 변호사가 부림 사건을 접하기 전의 모습과 유사하며, 결국 영화에서 드러내려했던 그 정신과도 괴리감을 보인다.
지금의 여건이 지속된다면 영화 <변호인>은 지금 천 만 영화<변호인>에 그치지 않고, 천만 <또 하나의 약속>, 천만 <천안함 프로젝트>가 될 수도 있다.
‘변호인’ 볼 권리 확보한 영화로 남아야
물론 영화의 성격과 제작비 등 여러 요인들이 있지만, <변호인>같은 좋은 영화가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안정적으로 배급·상영되려면 그에 대한 대안들을 같이 고민하고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 제작가협회 등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며, 독립영화계와 예술영화관 제도를 두고 있는 영화진흥위원회 등이 다양한 경로에서 방법들을 연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러한 흐름에 귀 기울이고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변호인>은 그저 그런 천 만 영화가 아니라 수천만의 볼 권리 확보에 기여한 영화로 남을 것이다.
또 흥행수입으로 주요도시에 <변호인> 영화관을 만들어 다양한 영화가 공존하는 영화생태계의 옹달샘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이러한 노력들이 쌓이고 쌓이다보면 <천안함 프로젝트>와 같은 갑작스런 개봉관 축소사태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개봉관을 늘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또 하나의 약속>과 같은 사태도 피하게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지나간다면 결국 <변호인>도 그저 그런 천 만 영화의 하나로만 기억되지 않을까? 그리고 영화를 통해 많은 이들이 감동을 느꼈던 그 노무현정신도 노무현 2.0이 아니라 그저 바람처럼 한 번씩 스쳐가는 추억에 그치고 말 것이다. 적어도 ‘국가’라는 메시지를 던진 영화를 봤다면 관객도 이에 상응하는 영화적 소양을 갖춰야 하며, 영화 또한 관람환경과 배급여건 조성에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평소 그러한 일을 하고 있는 우리 예술영화관을 비롯한 다양한 흐름에 심리적 부채의식 정도는 가져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저항하지 않으면 거대자본이 구축한 그 쳇바퀴에 누가누가 더 잘 도냐는 이전투구 밖에 남지 않을 테니 말이다.
<또 하나의 약속>은 아버지가 직업병으로 사망한 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삼성이라는 거대자본과 사투를 벌이는 영화로 <변호인>처럼 법정 공방이 중요부분을 차지한다.
삼성에게 뺨맞고, 삼성에서 벌이는 잔치
이 영화는 지금 좌석점유율에 비해 개봉관수가 적어 상영관 확보를 위한 사투를 벌이고 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거대자본과 싸우면서 거대자본의 극장망을 확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으며, 많은 이들이 도와야 이것이 가능하다는 약간의 강권마저 하고 있다. 물론 다수가 이 영화의 내용에 공감하고 있어 문제 삼을 생각은 없지만, 그 거대자본이라는 것이 다름 아닌 삼성인데, 삼성에서 뺨 맞고 삼성에서 잔치를 벌이겠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현실적으로 좋은 영화를 많은 분들에게 전하려는 노력이 매우 필요하고, 때로는 영화를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그러나 평소 이런 노력을 기울이던 곳에 전혀 눈길 한 번 주지 않다가 정작 자신들이 다급해지자 지푸라기라도 잡아보겠다는 심정으로 거대자본에게 아등바등 손 내미는 모습은 영화의 내용과는 무관하게 썩 보기 좋지 않다.
물론 <변호인>이나 <또 하나의 약속>은 상업영화이기 때문에 예술영화관들과 직접적 연관이 없고, 현실적인 여건상 적극적으로 상영을 고려하는 영화들은 아니다. 그러나 배급에서 매번 만신창이가 돼서야 찾는 곳이 예술영화관이 되어서야 하겠는가?
이제 다수의 영화를 변호하는 영화가 한번 쯤 나와 줘도 될 시점이 아닐까? 양질의 영화생태계는 다 같이 만들어가는 것이지 누군가 만들면 누리기만 하는 곳이 아니다. 누군가는 나치에 협력하지 않았기에 무죄일 수 있겠지만 누군가는 저항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유죄가 될 수 있듯이 말이다.
남태우 대구경북시네마테크 대표/팩트TV 뉴스디스크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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