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TV-이기명칼럼】
■브루투스, 너마저(Et tu, Brute)
60여 년 전 서울 명동의 시민회관 연극무대. 무대에서는 ‘줄리어스 씨저’가 동지이자 부하인 ‘부루투스’에 칼에 맞아 쓰러지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비장한 말 한마디. "브루투스, 너마저(Et tu, Brute)"다.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며 루비콘강을 건넌 사람.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로 정복의 감격을 표현한 사람. 씨저의 관한 일화는 수도 없이 많지만 지금 씨저의 일화를 소개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왜 "브루투스, 너마저(Et tu, Brute)"란 말을 남기고 죽어야 했는가. ‘부루투스’는 왜 씨저를 죽여야 했는가.
마지막 보루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마지막 보루다. 무너지면 끝이다. 마지막 보루가 무너질 때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부루투스가 씨저를 암살한 것은 바로 보루인 공화제가 무너지는 절망감 때문이다.
■그래도 한 가닥 믿음은
서로 다투다가 하는 말은 ‘법대로 하자’ ‘좋다. 법대로 하자.’ 그러나 법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느끼면 그때는 의지할 데가 없다. 어떻게 할 것인가. 원망밖에 없다. 좀 심하면 저주밖에 없다.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에 큰 상처를 준 것에 대해 대법원장으로서 마음 깊이 사과한다”
“이번 일로 인한 국민 여러분의 충격과 분노 그리고 실망감이 어떤지 잘 알고 있고, 저 역시 참담한 심정이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대법관 간담회를 끝낸 뒤에 발표한 입장문이다. 그가 말한 ‘국민 여러분의 충격과 분노’가 무엇인지는 설명을 하지 않아도 국민들이 잘 알 것이다. 왜 그토록 분노했는가. 분노와 충격에는 누구보다도 익숙한 국민들이다. 그런데도 분노와 충격을 느꼈다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을까.
법원의 적폐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김명수 대접원장일 것이다. 몰랐다고 한다면 대법원장 자격이 없다. 그는 자신의 직을 국민 앞에 걸고 법원적폐를 일소해야 할 것이다. 법이 바로 서지 않은 나라에 무슨 희망이 있는가.
국민들은 누구를 믿는가. 국회를 믿는가. 경찰을 믿는가. 검찰을 믿는가. 언론을 믿는가. 국민들은 침묵이다. 뻔한 것을 왜 묻느냐고 할 것이다. 그렇다. 국민들은 안다. 위로는 대통령부터 거리 잠을 자는 노숙자들도 다 알 것이다. 그래도 불쌍한 국민들이 조금은 기대하는 곳이 있다. 부루투스가 기대했던, 아니 로마 국민들이 기대했던 씨저. 아니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사법부다. 대법원이다.
기대가 참혹하게 무너졌다. ‘국민 여러분의 충격과 분노 그리고 실망감’ 김명수 대법원장이 토로한 고백에 대해 국민들은 머리를 떨군다. 마지막 보루? 개나 물어가라.
(이미지 출처 - SBS 그것이 알고싶다 영상 캡쳐)
■국정원과 법원행정처
법관에 대한 뒷조사와 재판과 관련된 뒷거래 정황이 드러난 사법부 블랙리스트. 벌어진 입이 닫히질 않는다.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오로지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을 한다는 법관들에 대한 블랙리스트가 있다니 판사들도 별거 아니라고 할지 모르나 판사들은 땅을 칠 노릇이다. 이미 법관들에 관한 블랙리스트 문제는 새삼 드러난 것이 아니지만 이제 만천하에 공개됐다.
이제 재판을 받는 국민은 법복 입고 의젓하게 앉아서 방망이 두들기는 판사의 판결을 믿을 것인가. 판결을 내리는 판사를 보면서 저 판사가 블랙리스트에 오를까 겁나서 제대로 판결을 할 수 있을까 의구심을 갖는다면 판결의 의미는 없다. 법복은 벗어버려야 한다. 그러나 권위와 존경이 땅에 떨어졌어도 판사의 재판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곰팡이를 제거하면 음식은 상하지 않는다. 판사 블랙리스트의 곰팡이는 어디에 있는가. 대법원 추가조사위원회가 22일 공개한 보고서에 따르면 양승태 대법원장 체제 아래서 법원행정처는 사실상 ‘사법부의 국정원’ 구실을 했다고 한다. 그럼 ‘사법부의 국정원장’은 뉘신가. 바로 법관 뒷조사의 실무 총책임자인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을 지목하고 있다. 더욱이 법원행정처는 다른 판사 컴퓨터는 내놓으면서도 유독 임 차장의 컴퓨터는 ‘신중한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음’이라는 황당한 이유로 제출을 거부하고 있다.
임종헌 차장의 컴퓨터 속에는 무엇인 들어 있는가. 구렁이 담 넘어가듯 은근슬쩍 넘어갈 작정인가. 안 될 것이다. 임종헌이 경질됐다. 이번에는 당사자가 없어서 컴퓨터를 못 연다고 할 것인가.
■판사를 믿지 못하면
파출소와 재판소, 처갓집 화장실은 멀리 있을수록 좋다고 했다. 이유는 알아서 해석해라. 송사 3년에 기둥뿌리 뽑힌다고 했다. 모두가 부정적인 평가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은 인혁당 재건위 피고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독재정권은 8시간 만에 집행했다. 세계에 이름을 떨친 사법살인이다. 대법원 판결이 국민의 불신을 받는 출발이 됐다. 할 말 있는가. 있다. 판사 출신인 여상규란 자유한국당 국회의원은 ‘웃기고 앉아있다’라고 했다. 말을 잃는다.
지난 23일 현직 대법관 13명은 간담회를 열고 원세훈 전 국정원장 사건 재판이 “사법부 내외부의 누구로부터 어떤 연락도 받은 사실이 없음을 분명히 한다”고 했다. 그들은 이를 비판한 언론보도에 대해서도 “의심과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깊은 우려와 유감”을 표시했다. 오해라 했는가. 대법관 13명 중 6명은 재판에 관여도 안 했는데 그들이 진상을 어떻게 안다는 것인가. 판단력이 망가졌는가. 웃기려고 작심했는가.
대법원이 불신받고 대법관이 존경을 잃으면 법치는 끝이다. 말로 아무리 개혁을 떠들어도 국민이 믿어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버선목이라고 뒤집어 보일 수도 없고 MRI 뱃속에 넣고 살아도 안 믿는다. 폼만 잡으면 뭘 하겠는가.
이번 사건에도 우병우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원세훈의 재판 관련 ‘박근혜 청와대’와 법원행정처가 ‘부적절한 뒷거래’를 했다는 의혹이 불거진 가운데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과 우병우가 수십 차례 통화한 사실이 24일 확인됐다.
우병우는 안 끼는 곳이 없다. 청와대와 법원행정처가 얽혔다는 의혹은 그 자체만으로도 치명적이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개혁의 마당으로 나간다고 공언했다. 비장한 각오다. 국민들의 무서운 눈이 지켜보고 있다.
대법원 너마저. 이런 소리는 다시 듣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기 명(팩트TV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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