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TV-이기명칼럼】
■누가 이 나라를
나라를 망쳤다고 한다. 망쳤다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다. 정치적, 경제적, 도덕적으로 나눌 수 있다. 특히 도덕적 추락은 양심의 실종이다. 도덕적인 책임을 누가 지는가. 사법과 재벌, 언론에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권력을 업고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 책임은 어떻게 질 것인지 대답해야 한다.
무서운 법과 언론을 건드리고 있으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나 보다. 오로지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한다는 재판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주접을 떤다. 그래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언론의 자유가 헌법에 보장되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하나 낯이 간지럽다. 죄 없이 사형을 당한 국민이 있고 기사 한 줄 소신대로 썼다가 잡혀가 불구가 된 기자가 있고 마음에도 없는 글을 수도 없이 써야 했던 내 자신도 있다. 과거는 부정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죽는 날까지 속죄하며 사는 수밖에 없다.
- 선 서 -
[판사]
본인은 법관으로서,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양심에 따라 공정하게심판하고, 법관윤리강령을 준수하며, 국민에게 봉사하는 마음가짐으로 직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검사]
나는 이 순간 국가와 국민의 부름을 받고 영광스러운 대한민국 검사의 직에 나섭니다. 공익의 대표자로서 정의와 인권을 바로 세우고 범죄로부터 내 이웃과 공동체를 지키라는 막중한 사명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나는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 있는 검사,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따뜻한 검사,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평한 검사,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바른 검사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국민을 섬기고 국가에 봉사할 것을 나의 명예를 걸고 굳게 다짐합니다.
판·검사의 선서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요렇게 깔끔한 줄을 모르는 국민이 얼마나 많을까.
■양심이란 무엇인가
헌법을 비롯한 각종 법이 명문화되어 있다. 그러나 양심법은 어디에 있는가. 도대체 양심이란 무엇인가. 깊은 산속에 뽀록뽀록 올라오는 옹달샘이 있다. 어렸을 때 산에 올라가 목이 마르면 손으로 떠마셨다. 장마가 지고 홍수가 나도 산에 올라가면 옹달샘의 물은 변함없이 솟아났다. 변함없이 새 물을 보내주는 옹달샘을 양심이라고 하면 너무 현학적인가.
법과 양심에 따라 한다는 재판 광경을 많이 보았다. 판사가 판결문을 읽는다. 형량도 가지가지. 판결 순간 고개를 툭 떨어트리는 피고가 있다. 화색이 도는 피고도 있다.
그 모두가 판사의 법과 양심에 따른 판결의 결과다. 무죄판결을 받았던 한명숙 전 총리는 별건 수사로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2년 복역 후 8월 23일 새벽 5시에 출소한다.
재판을 말하면 지금도 잊지 못할 판결이 있다. 또 그 얘기냐고 할지 모르지만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세계사법사에 사법살인이라고 기록이 된 인혁당재건위 사건이다.
도예종 서도원 하재완 송상진 우홍선 김용원 이수병 여정남
이들은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다. 국방부는 판결이 난지 불과 18시간 만에 쫓기듯 사형을 집행한다. 가족들은 하루아침에 ‘빨갱이 가족’이 됐다. 천형과 같은 빨갱이 가족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로부터 32년이 흘러 지난 2009년 1월 23일 이들에게 무죄가 선고되고 검찰이 항소를 포기했다. 국제법학자회의는 4월 8일을 '세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32년 후의 무죄판결이 무슨 소용인가. 그들은 법의 이름으로 세상을 떠났다. 양심의 판결을 어떻게 됐는가.
법과 양심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한 판사들은 누구인가. 그들이 무죄 확정 후 무슨 말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지금도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을 한다는 말을 믿어야 할 뿐이다. 이 나라 불교의 큰 스님이신 효봉스님은 판사 시절 자신이 내린 사형판결에 고뇌하다가 삭발하고 불교에 귀의했다.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교도소 얘기를 담은 책이다. 형장으로 가는 사형수들은 문득 발을 멈추고 하늘 한 번 보고 땅을 한 번 내려 다 본다고 한다. 마지막 가는 세상을 가슴에 담아두자는 것인가.
젊었을 때 서대문 교도소의 형장을 취재 간 적이 있었다. 외따로 떨어진 건물이다. 형장은 사형수가 가는 마지막 길이다. 사형수가 앉은 의자가 있다. 소정의 절차가 끝나고 사형수가 의자에 앉으면 가림 막 밖에서 신호가 오고 이어서 의자 밑 마루가 덜컹 열리고 사형수는 밑으로 떨어지며 목이 달린다. ‘덜컹’하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소리다.
목이 달렸던 동아줄은 노랗게 기름때가 묻었다. 저 줄에 달렸던 무수한 사형수는 누구인가. 일일이 이름을 열거할 수도 없다. 세계사법사에 길이 남을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라진 8명의 이름도 있다. 저승은 있는가. 있다면 그들은 서로 만날 것이다. 이승만, 박정희, 김재규, 4·19 희생자, 5·18 희생자. 그들은 만나서 무슨 말을 할까.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한 법과 양심의 대행자들은 무슨 말을 할까. 더운 날씨 탓일까. 머리가 어지럽다.
돌아오라! 마봉춘, 고봉순 - 세번째 불금파티(사진출처 - KBS새노조)
■언론과 양심
기자선서도 있으려니 하고 찾았는데 못 찾았다. 그 대신 언론인 강령이 있다. 언론인들이야 당연히 다들 알겠지만 국민들을 위해 소개한다.
- 언론인 강령 -
1. 우리는 어떤 내 외부의 간섭과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언론자유 수호에 앞장선다.
2. 우리는 보도대상에 대한 어떤 차별과 편견을 거부하고 공정보도를 추구한다.
3. 우리는 통일 및 북한관련 보도에서 전민족적 통합과 통일논의를 활성화하는데 주력한다.
4. 우리는 노동자, 장애인, 농민, 서민 등 사회적 약자의 인권과 고통 개선에 적극 노력한다.
5. 우리는 오보에 대한 신속한 정정과 반론권을 적극 인정한다.
6. 우리는 취재 및 보도, 업무수행 과정에서 발생하는 금품의 수수 등 직접 이익은 일절 도모하지 않고 간접이익도 엄격히 제한해 높은 청렴성을 확립한다.
7. 우리는 취재활동 및 업무수행 과정에서 위법적 활동을 하지 않고 취재 및 보도 대상의 권리와 명예를 보호한다.
8. 우리는 대외활동에서 사회공기(公器)의 역할 수행을 자임하며 이를 위한 높은 도덕성을 유지한다.
9. 우리는 지금까지 관행적으로 허용, 유지돼온 부정적 언론환경을 적극 개선한다.
10. 우리는 이번 자정선언의 취지가 반드시 언론인들의 활동현장에 뿌리내리도록 구체적인 실천계획에 입각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전국언론노동조합은 언론인 스스로 실천하는 자정운동만이 언론개혁의 지름길이며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언론자유를 올바르게 전 국민에게 되돌릴 수 있는 길임을 거듭 확인한다.
2001년 11월 23일
전국언론노동조합
비판, 공정, 균형. 글을 쓸 때 염두에 두는 철칙이지만 어림도 없다. 도리 없이 감정은 개입된다. 그래도 어느 정도라야 된다. 무관의 제왕이란 얼마나 대단한 권력인가.
비록 ‘기레기’란 치욕으로 눈을 깔고 살아도 초심의 열정은 살아 있을 것이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느냐고 한탄하는 후배들이 있다. 언론자유를 외치며 광화문 동아일보 앞 광장에 동댕이쳐지던 기자들은 이제 늙어서 죽고 살아도 산 게 아니다. 신문을 펴든 그들의 늙은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선하다.
왜 이 지경이 됐느냐고 탄식할 필요가 없다. 온 국민이 다 알고 있는 부끄러운 사실이기 때문이다. 탱크를 몰고 정권을 뒤엎은 군부가 제일 먼저 공격하는 곳은 방송국이다. 무섭기 때문이다. 신문검열을 하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언론을 장악하면 정권은 손안에 들어온다. 불의한 권력들은 그렇게 생각해 왔고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동안 한국 언론이 걸어 온 가시밭길을 무슨 표현으로 다 할 수 있으랴. 권력 앞에 무릎을 꿇고 국회의원이 된 언론인의 숫자가 하나둘이 아니다. 정치하기 위해 기자가 됐다는 정치인도 있다. 좋다. 기자라고 직업선택의 자유를 제한받을 수는 없다. 그러나 하려면 제대로 해라. 기자가 될 때의 그 초심으로 정치하라는 것이다. 몇몇 언론의 기자 출신이 하는 정치행태를 보면서 후배 기자들이 낯을 붉히는 이유를 그들은 알아야 한다.
언론이 몸부림치고 있다. 9년 동안 해직되어 있던 YTN의 노종면 한덕수 조승호 기자의 사슬이 끊어졌다. 국민은 보았을 것이다. 언론인들도 보았을 것이다. 이효성 방송통신위원장이 문병을 간 MBC의 이용마 기자. 초췌한 병색의 그를 보면서 눈물이 솟았다. 이게 무슨 몹쓸 짓이란 말인가. 김장겸은 눈도 귀도 없단 말이냐.
무더기로 허가해 준 종편에서 쏟아지는 뉴스는 차마 언론이라는 이름으로 시청할 수 없는 것이 수두룩하다. 진행자라는 기자 출신 앵커는 대학교수를 앉혀놓고 성매매를 하지 않았느냐고 닦달한다. 이게 언론이냐 사람이냐. 소위 평론가라는 이름의 진행자는 편파방송의 기수로 날뛴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MBC 기자와 PD들은 제작거부에 들어갔다. MBC의 상징인 PD수첩과 ‘시사매거진 2580’이 제작거부에 들어갔다. KBS도 14년 차 이상의 기자 118명은 “고대영은 지금 당장 한국방송 사장직에서 사퇴하라”며 “우리는 고대영이 사장 자리에 있는 한, 그 어떤 보직도 전면 거부한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KBS 앵커 보직 기자 23명은 반성부터 했다.
“우리 기자 보직자들은 후배들 징계와 보도참사 앞에서 미력이나마 노력해보려 했지만 불통의 벽 앞에서 좌절했다. 자괴감과 좌절이 쌓여 지쳤다는 핑계로, 어느 순간부터는 침묵했으며, 어느 순간부터는 외면했다. 먼저 반성한다. 그리고 이제 더는 참담한 현실을 외면만 하고 있지 않으려 한다.”
대통령으로 당선된 문재인을 공산주의자로 지칭한 MBC 방문진 이사장은 문재인을 지지한 모든 국민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는 검찰에 기소됐다. 김장겸이 쫓아낸 자리를 메꾼 현재의 기자들과 PD들은 다른 자리로 가야 한다. 원주인에게 돌려줘야 한다. 그래야 사람대접받는다.
사원들로부터 퇴진이 공개 요구된 KBS 이사장과 사장은 무슨 얼굴로 출퇴근을 하는가. 이것이 진정으로 언론사를 이끌어 갈 얼굴들인가. 그들은 위에 적시한 ‘언론인 강령’을 한 번만 읽어보기 바란다.
언론인의 양심은 세상에 오물을 씻어주는 강물 같다. 강물이 막히거나 오염되면 그 순간 세상은 오물의 세상이다. 지금 언론이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궐기하는 것이다. 그들이 촛불을 드는 것이다.
■법과 언론의 양심
양심은 보이지 않으나 느낀다. 법정에 선 피고의 얼굴의 미세한 떨림에서 우리는 양심의 동요를 볼 수 있다. 비록 ‘기레기’라는 오명으로 불린다 해도 그들이 쓴 기사에서 양심의 통증을 느낄 때가 있다. 더는 인내하지 말라. 이 나라는 지금 당신들의 피 맺진 궐기를 기다리고 있다.
죽었다 살아나는 것은 양심밖에 없다. 양심의 부활처럼 귀하고 장한 것은 없다. 지금 국민이 목마르게 기다리는 것이 바로 죽은 양심의 부활이다.
이기명 팩트TV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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