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TV-이기명칼럼】 싸웠노라. 이겼노라. 웃겼노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
유승희가 최고회의 석상에서 뜬금없이 ‘봄날은 간다’를 간드러지게 불러제끼더니, 따라 부르는 ‘아리랑’이냐 할지 모르나 천만의 말씀이다. 지금 부르는 ‘아리랑’에는 말 못한 불쌍한 영혼들의 한이 맺혀 있다.
유승민이 쫓겨났다. 구질구질하게 쫓겨난 이유나 경과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 최고 존엄의 말씀을 거역한 불경죄다. 그러나 쫓겨나면 죽는가. 유승민은 죽지도 않고 죽을 수도 없고 죽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을 것이다. 유승민은 값진 선물을 주고 떠났다. 고별사다.
저는 오늘 새누리당 의원총회의 뜻을 받들어 원내대표직에서 물러납니다.
무엇보다 국민 여러분께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고된 나날을 살아가시는 국민 여러분께 저희 새누리당이 희망을 드리지 못하고, 저의 거취 문제를 둘러싼 혼란으로 큰 실망을 드린 점은 누구보다 저의 책임이 큽니다. 참으로 죄송한 마음입니다.
오늘 아침 여의도에 오는 길에, 지난 16년간 매일 스스로에게 묻던 질문을 또 했습니다. ‘나는 왜 정치를 하는가?’ 정치는 현실에 발을 딛고 열린 가슴으로 숭고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진흙에서 연꽃을 피우듯, 아무리 욕을 먹어도 결국 세상을 바꾸는 것은 정치라는 신념 하나로 저는 정치를 해왔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진작 던졌을 원내대표 자리를 끝내 던지지 않았던 것은 제가 지키고 싶었던 가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법과 원칙, 그리고 정의입니다. 저의 정치생명을 걸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오늘이 다소 혼란스럽고 불편하더라도 누군가는 그 가치에 매달리고 지켜내야 대한민국이 앞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난 2주간 저의 미련한 고집이 법과 원칙, 정의를 구현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저는 그 어떤 비난도 달게 받겠습니다. 거듭 국민 여러분과 당원 동지 여러분의 용서와 이해를 구합니다.
임기를 못 채우고 물러나면서 아쉬움이 있습니다.
지난 2월 당의 변화와 혁신, 그리고 총선 승리를 약속드리고 원내대표가 되었으나, 저의 부족함으로 그 약속을 아직 지키지 못했습니다.
지난 4월 국회연설에서 ‘고통받는 국민의 편에 서서 용감한 개혁을 하겠다. 제가 꿈꾸는 따뜻한 보수, 정의로운 보수의 길로 가겠다. 진영을 넘어 미래를 위한 합의의 정치를 하겠다’고 했던 약속도 아직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원내대표가 아니어도 더 절실한 마음으로 그 꿈을 이루기 위한 길로 계속 가겠습니다.
저와 꿈을 같이 꾸고 뜻을 같이해주신 국민들, 당원 동지들, 그리고 선배 동료 의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유승민의 승리
조폭 세계에 왕초와 똘마니가 있듯 정치판에도 대장과 졸개가 있다. 김무성·서청원이 아무리 꺼떡대도 별수 없는 졸개다. 그러나 졸개라도 할 말 하는 졸개가 있다. 김영삼이 야당이면서도 권력을 휘두르며 불의한 3당 합당을 자행했을 때 저항했던 졸개가 바로 노무현이다. 국민들은 노무현의 용기를 평가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발사한 레이저를 누가 감히 되받아치겠는가. 유승민의 ‘청와대 얼라’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 등의 발언이 가져올 파장을 모를 리가 없다. 박 대통령으로서는 기가 막혔겠지만, 유승민은 개의치 않았다. 해야 할 말이라고 여긴 것이다. 칼날 위를 걷는 듯 위태했다. 유승민은 버텼고 결국 쫓겨났다. 유승민이 패했는가. 굴복했는가. 국민들은 이미 평가했다.
새누리당 의원총회에서 유승민 퇴진을 요구했다는 ‘개개의 헌법기관’인 의원들. 그들이 유승민을 원내대표로 선출했고 그들에 의해 쫓겨났다. 친박을 향해 퇴진반대 발언을 했던 이들이 왜 퇴진을 요구하고 나섰는가. "유승민, 사퇴는 불명예가 아니라 아름다운 것"이라든가 “불명예가 아니라 자랑스러운 것”이라는 등의 서청원·김무성의 헛소리를 새누리 의원들은 믿고 있는가. 정말 자랑스러운 것인가. 더이상 거론하면 바보다.
대통령과 전쟁을 치른 유승민도 어떤 결과가 나오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국민들도 같다. 또한, 친박이나 비박이나 모두 알았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백기를 들지 않는 유승민이 얼마나 미웠을까. 보지 않아도 뻔하다.
유승민은 왜 항복하지 않았을까. 청와대와 친박 세력들의 애간장을 다 태우면서 유승민을 버티게 한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는 고별사에서 밝혔고 그것을 국민들은 믿는다. 특히 그가 절규하듯이 토해 낸 말이 가슴을 친다.
“그것은 법과 원칙, 그리고 정의입니다. 저의 정치생명을 걸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교활한 정치인들에게 설사 사기를 당해도 국민들은 진실을 안다. 국민들이 진실을 안다는 사실에 더욱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있다. 한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있어도 만인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가엾구나. 김무성
JTBC는 유승민이 여론조사에서 김무성을 제치고 여권의 대선후보 2위를 기록했다고 보도했다. 일부 언론은 유승민이 미리 계산하고 대통령과 한판 벌였다고 하지만 그런 건 관심 없다. 다만 국민의 인식이 무섭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또 하나는 국민이 김무성을 폐기했다는 사실이다. 김무성 같은 지도자는 너무나 많아서 이제 더이상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국민은 너무나 잘 안다.
인간이 가장 무서울 때는 수치심을 잃어버렸을 때라고 한다. 인면수심의 인간이 얼마나 무서운가. 인면수심을 비난하면서도 인간은 늘 짐승의 마음과 가까이 있다. 유승민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보여 준 인면수심은 놀랍지도 않다.
박근혜 정권의 유승민 축출극은 우리나라 정치사상 또 하나의 수치로 기록될 것이다. 유승민의 고별사를 들은 많은 국민들은 한국 정치의 희망과 절망을 같은 자리에서 느꼈을 것이다. 비극이든 희극이든 모두가 교훈을 담고 있다. 이 정권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허나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 있다. 불의는 반드시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이제 유승민의 등 뒤에는 국민의 뜨거운 시선이 따를 것이다. 그 의미를 유승민은 잘 알 것이다. 선택은 자신이 한다. 그가 외치던 꿈을 이룩하던 몰락을 하던 그 역시 자신의 책임이다.
이기명 팩트TV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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