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TV - 이기명칼럼】 ‘배신의 정치’와 ‘아몰랑 난 못해’
거부권이 무엇인가. 한 마디로 ‘아몰랑. 나 못해’다. 무엇을 못 한단 말인가. 다들 아는 얘기니까 구구하게 설명을 줄이자. 거부권은 헌법에 보장된 대통령의 권리다. 막을 방법은 국회에서 다시 재의하는 것이다. 국회의장이 재의에 붙인다고 했으니 두고 볼 일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12분 동안 준열(峻烈)하게 성토했다. TV를 통해 본 대통령의 얼굴에는 서릿발이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어떤 사람은 잔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고 한다. 대통령의 과녁은 ‘유승민’이다. 명색이 여당의 원내 대표다. 참혹하게 깨졌다. 깨지면서 유명해지는 방법도 있다. 진검 승부라고 했다. 대통령에게 무슨 불경한 소리냐고 할지 모르나 대통령의 국민지지율을 비교해 보면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그럼 누가 승자인가. 하루가 지나 유승민이 납작 엎드렸다고 했지만, 국민들은 졌다고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승자라는 것이다. 대통령 스스로 패착을 두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권위는 어디로 갔는가. 국민이 답을 알고 있다.
대통령은 배신을 강조했다. 여기서 국민은 또 헷갈린다. 무슨 배신인가. 누가 배신을 했는가. 대통령은 정치인들이 국민을 배신했다고 질타했다. 맞는 말이다. 그들의 국민 배신을 어떻게 일일이 지적하랴. 그래서 접어둔다. 그럼 대통령 어떤가.
■배신의 정치? 누가?
‘부르터스 너마저’ 로마의 통치자 ‘시저’가 ‘부르터스’의 칼을 맞으며 한 말이다. 부르터스는 시저가 민주주의를 배신했다고 생각했고 시저는 부르터스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믿었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유승민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분명히 말했다. 유승민이 ‘부르터스’이고, 박근혜는 ‘시저’인가.
“국민의 삶을 볼모로 이익을 챙기려는 구태 정치” “당선된 후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
정치권은 믿을 수 없는 집단으로 매도한 이 말은 바로 박 대통령이 쏟아 낸 격한 발언이다. 수긍이 되는가. 배신이 무엇인가. 약속 파기가 배신이다. 더구나 국민을 앞에 두고 수도 없이 약속한 공약은 파기하면 안 되는 절대 약속이다. 바로 이 약속을 파기한 사람은 누구인가.
집권 후 2년 반 동안 대선 때 약속했던 주요 공약들은 하나하나 ‘없었던 일’로 파기됐다. ‘배신의 정치’ 비판에 ‘배신당한 것은 국민’이란 분노가 끓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당연하다. 실수는 한 번이지 거듭하면 무능이다.
‘65세 이상 모든 노인에게 월 20만 원의 기초연금을 지급하겠다’는 대표적 복지공약은 소득하위 70%에게 차등지급하는 것으로 축소됐다. 외교안보 분야 핵심 공약이던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공약은 파기됐고, 2014년 완성을 약속했던 반값 등록금은 2015년 이후로 미뤄졌다. 누가 배신을 말할 수 있는가. 일일이 열거할 수조차 없다.
문재인은 국회에서 발표한 대국민 호소문에서 “정작 국민들로부터 심판받아야 할 사람은 대통령 자신”이라며 “대통령은 국회와 국민을 향한 독기 어린 말을 반성하고 사과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대통령 당선에 1등 공신인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는 “배신은 박 대통령이 한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의 경제스승 김광두 교수도 광화문광장에 엎드려 국민에게 석고대죄해야 한다고 고백했다. 대통령을 위해 일하던 정치경제 전문가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그들이 배신하고 떠났는가. 이제 배신의 의미는 새로 해석되어야 한다.
■왜 거부권인가?
유승민은 눈엣가시다. 그는 국회 중심의 정치를 역설해 왔다. 증세 없는 복지를 비판했다. 김무성과 유승민이 있는 한 내년 총선에서 친박의 몰락은 불을 보듯 뻔하다. 대통령의 권력장악은 물 건너간다. 허수아비 대통령이다.
유승민을 내치지 않으면 박근혜 정치는 끝이다. 콘크리트 지지율도 무너져 간다. 겨우 29%의 지지율이다. 어디 가서 지지자라고 말도 못 꺼낼 판이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12분 동안 쏟아 놓은 정치배신론은 대통령 자신이 그대로 안고 가야 할 것이다. 바보 언론들은 국무회의 참석자의 입을 빌려 ‘박 대통령 서릿발에 한여름 ‘오싹’이라고 했다.’ 무엇을 잘못했기에 오싹했을까? 정상적인 사고의 소유자라라면 오싹할 리가 없다.
유승민은 몸을 한껏 숙여 사과했다. ‘노여움을 푸시라’고 간청했다. 아니 애걸했다. 진정한 사과인가. 대통령이 바라는 사과는 허리를 굽히라는 것이 아니다. 당장 그만두라는 것이다. 국민들 바닥에 떠도는 말을 들어 보라. 유승민에게 박수를 보낸다. 새누리당에도 저런 인물이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김무성과는 비교도 안 된다는 평가다. 그것이 싫은 것이다.
유승민이 잃을 것은 잠시다. 잘못이 없는데 무엇을 잃는단 말인가. 잘못 없이 얻어맞고 어디에다 사과해야 하는가. 정치는 단거리 경주가 아니다. 유승민이 쫓겨나도 그는 국민에게 큰 선물을 안겨 주었다. 무너지기 시작한 건물은 대책이 없다.
대통령의 거부권은 만능인가. 모든 법 집행은 정당성을 가질 때 힘이 있다. 대통령의 거부권 속셈은 눈에 훤히 보인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막강한 위력의 거부권이 있다. 바로 국민의 가슴속 거부권이다. 국회는 재의에 붙여야 한다. 그것은 국회의 거부권이다. 아니 국민이 보여주는 거부권이다.
온 국민이 알고 있는 사실을 박 대통령만이 모른다. 세월호 참사도 7시간 동안 모르고, 메르스 사망자 숫자도 모른다. 이것이 실수인가.
국민의 거부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잊지 말기 바란다. 대통령이 국민을 잊으면 국민도 대통령을 잊는다. 유승민이 망나니 칼춤 밑에서 목을 느리고 있다. 국민이 지켜보고 있다.
이기명 팩트TV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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